영화라는 문화가 나에게 다가선 건 비디오라는 기계가 보편화되기 바로 이전부터다.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그것도 스파이 작전을 방불케 하는 치밀한 계획하에 몰래보던 비디오, 제목은 전혀 기억에 없다. 다만 그때 친구들과 봤던 작품(?)에서는 여배우들의 풍만한 가슴은 전부 볼 수 있었던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그로 인해 지금의 나의 상상력이 풍부해졌을지도 모른다.
난 영화를 단순하게 본다. 재미있다, 재미없다, 웃긴다, 슬프다, 감동적이다, 허무하다 등등. 이런 느낌 이외의 것은 전부 고리타분하다. 그래서인지 해피엔딩의 결말이 좋고, 화끈하게 때려부수는 영화가 좋다. 난 영화를 보면서 갖가지 직업의 꿈도 키워갔다. 톰 크루즈가 멋지게 술병을 돌리던 <칵테일>을 보며 소주병을 돌렸고, 진정한 남자의 세계를 탐닉하고자 프라모델 권총을 들고 경찰의 꿈을 키웠던 멜 깁슨의 <리쎌 웨폰>- 경찰이 안 되기를 잘했다.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해서 무작정 그가 되어보고 싶은 심정에 연마했던 무술, 하지만 비슷하게 되지도 않았다. 그는 성룡이다. 그땐 그들처럼 되려고 무단히도 노력했다. 그들 옆에는 항상 미모의 여인이 있었기 때문은 절대 아니다.
그러던 어느 더운 여름날 커다란 대형 와이드 스크린도 아니고 서라운드 돌비 입체음향 같은 거대하고 웅장한 시스템을 통한 것도 아닌, 기억나지 않는(추석쯤으로 쯤으로 기억된다) 명절 때 방영된 추석특선 대작영화, 그것도 처음이 아닌 재탕에 재탕을 거친 20대 중반의 나에게 얼핏 지나가던 음악이 내 인생의 방향을 제시함을 느낄 수 있었다.
빠~밤 빠~밤 빠밤빠밤빠밤… 하고 울리던 첼로와 타악기 연주의, 머리카락이 쭈뼛하고 곤두설 만큼의 강렬한 공포감이 깃든 의미심장한 소리로 나를 이끈 영화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죠스>다.
그 영화로 인해 어느새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상어 이야기. 특히 존 윌리엄스의 음악은 마치 조스의 심장 박동소리처럼 희생물에 가까이 다가가면서 점점 빨라지는데 관객의 심장 박동에 맞춰지도록 계산된 음악이라고 한다. 그 음악의 긴장감은 눈을 감고도 무섭고 섬뜩한 장면을 상상하게 한다. 화면을 보지 않고 들었던 그 음악은 내 뒤에서 그 큰 입을 벌리고 삼각뿔 모양의 날카로운 이빨로 나를 금세라도 집어삼킬 것 같은 공포감을 느끼게 했고, 그로 인해 난 조스보다 첼로의 선율이 더 무서워졌다.
<죠스>는 기존의 공포영화와는 매우 다른 영화다. 괴상하고 추잡한 가상의 괴물이나 특수분장으로 새롭게 태어난 어지러운 이름의 요괴들, 알지도 못하는 우주의 행성에서 나타난 외계인들을 소재로 한 영화보다 현실성 있는 식인상어를 공포의 소재로 삼은 공감이 가는 영화이다.
이 영화를 좋아하게 된 이유 중 또 다른 하나는 주인공인 조스가 꽁꽁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이제나 저제나 조스를 기다리던 나에게는 조스의 공포감이 더욱 크게 느껴졌고, 존 윌리엄스의 음악이 더욱 나의 초점을 화면에서 벗어나지 않게 했다. 내가 음악을 업(業)으로 삼고 있어서일까? 내가 음악을 작곡하고 악기를 만들면서부터 장면의 화려함보다 음악이 감싸고 있는 초라한 두 사람의 사랑 나눔이 좋아졌고, 건물이 폭파되고 차가 뒤집히는 소리보다 그 장렬함 뒤에 흐르는 슬프도록 애잔한 선율이 더 기억에 남는다. 내가 영화 선택을 작업할 때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영화를 뒷받침해주는 음악을 만들려고 고심하고 걱정했다. 절대 음악에 대한 욕심은 버렸다. 내가 생각하는 영화음악은 공간이다. 영화 안에서의 비어 있는 공간. 그 빈 공간을 난 나의 음악으로 채우는 작업을 한다. 결코 내가 주인공이 아닌 영화의 전체가 주인공이기를 바라며 난 그저 공간지기이기를 바라면서 작업한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이름 모를 영화의 황홀한 여자의 젖가슴과 날 극도의 공포로 휘몰아갔던 첼로와 타악기의 무섭고 흥분되는 공간 속에 난 기어들어가고 싶다. 그리고 그 공간에 나만의 세상을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