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미스틱 리버>의 하찮음에 대한 천착에 매혹되다
해를 거듭할수록 몸과 마음의 거리는 가까워진다고, 누군가 귀띔해준다. 그 말의 주술적 힘 때문인지, 정말 ‘아픈 영화’를 보면 몸이 아프다. <킬 빌> <올드보이> <미스틱 리버>. 올 겨울 극장가의 ‘복수 3부작(?)’을 연달아 본 결과 체력이 바닥났다. <올드보이> 상영 중에는 오한과 구토를, <미스틱 리버>를 본 뒤에는 몸살을 맞았다. 복수라는 테마에 이토록 민감하게 반응하는 내 몸이 무섭다. 나는 조화롭고 안온한, 달콤하면서도 묵직한 위무를 주는 영화를 찾고 있었다. 어떻게든 ‘복수’를 피해가고 싶었다. 그러나 인정해야 했다. 복수의 그늘을 피해갈 어떤 우회로도 지상에 존재하지 않음을.
나는 내가 무엇인가에 복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스스로를 정신적으로 자해하거나 엉뚱한 제3자에게 치명상을 남기는, 낮에도 가위눌리던 시간들. 핏발선 눈으로 운명의 맨얼굴을 똑바로 쏘아보는 거대한 복수는, 꿈도 못 꾼다. 쫀쫀하고 후줄근한 4류 복수극이 나의 낮꿈을 지배한다. 하지만 ‘칼’에 베인 상처보다는 ‘종이’에 베인 상처가 더욱 복수심을 자극한다. 종이에 베인 하찮은 상처를 그리기엔 영화의 스크린이 너무 크다. 일상 속에서 켜켜이, 시나브로 쌓여가는 복수의 정염을 그리기엔 러닝타임이 너무 짧다. 복수극의 일반적 문법은 ‘죽음’이라는 극한적 상황을 매개로 삼는다. 그러나 나는 위대한 복수조차 꿈꿀 수 없는 낯뜨겁고 치졸한 일상의 파편들로, 거품을 문 채 소주를 들이켠다. 꼬질꼬질한 기억의 세포 하나하나가 쌓여 마음속 종양을 키워나간다.
<미스틱 리버>는 거대한 복수를 다루고 있지만 그 거대함을 부풀리지 않고 그 하찮음에 천착해간다는 점에서, 내게는 <올드보이>나 <킬 빌>보다 매혹적이다. 극적 반전을 향한 강박도, 관객의 웃음에 대한 계산도 없는, 미련할 만치 우직한 영화. <미스틱 리버>는 복수의 스펙터클보다는 복수의 미세한 표정의 변화에 주목한다. 복수 자체보다는 복수 뒤의 손톱 만한 ‘여진’(餘震)들이 남겨진 사람들의 삶을 얼마나 서서히, 그러나 둔중하게 포획하는지. 끔찍한 아동학대의 기억, 그로 인해 멈춰버린 세 친구의 시간. 데이브에게 다가가지 못한 지미와 션의 ‘죄의식’은 25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들의 숨은 신으로 군림하여, 마침내 지미와 션은 데이브 살해의 공범이 된다. 복수의 칼날보다 무서운 것은 죄의식일지도 모른다. ‘복수의 늪’ 전체를 태워버리지 않는 한 누구도 기억의 사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용서나 망각이 불러일으키는 휴머니즘적 오만보다는, 복수가 가져다주는 광막한 어둠과 경쾌한 고독을 사랑한다. 나는 두 가지 복수를 생각한다. 인디언의 복수와 노신의 복수. 그들의 복수에는 분노도 열정도 구경꾼도 찬사도 없다. 시애틀 추장은 자연과 인디언에 대한 폭력이 누구보다도 백인 자신을 향한 폭력임을 알았다. 그는 부족의 멸망을 슬퍼한 것이 아니다. 그가 모든 것을 포기하는 유일한 조건으로 제시한 것은 “우리가 땅을 팔더라도 우리가 사랑했듯이 이 땅을 사랑해달라”는 것이었다.
중국의 혁명가 루쉰(魯迅)은 꿈속에서 한 묘비명을 발견한다. 천상에서 심연을 보고, 희망없는 곳에서 구원을 얻었다는 한 영혼의 죽음 앞에 놓인 이상한 묘비명: 떠도는 혼이 있어 화하여 뱀이 되었는데, 입에 독니가 있도다. 사람을 물지 않고 자기 몸을 물어뜯어 마침내 운명하다. 이윽고 거죽과 얼굴이 채 썩지 않은 끔찍한 그 시체가 일어나 말한다. “내가 티끌이 될 때, 너는 나의 미소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날 ‘나’의 ‘그림자’가 나에게 이렇게 작별을 고한다면? 그림자가 말한다: 암흑이 나를 삼켜버릴지도 모르고, 광명이 나를 지워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명암의 경계를 서성이는 것이 싫다. 암흑에 잠기는 편이 낫다. 나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그대를 따라가느니, 차라리 무(無)에서 서성일 것이다.
정여울/ 미디어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