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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홍콩에 대한 장르적 갈무리,<무간도2 혼돈의 시대>

<무간도>는 무엇보다 촬영감독 크리스토퍼 도일의 영화였다. 왕가위 스타일을 관객 머릿속에 스텝프린팅한 그는 질척이는 뒷골목 대신 유리 빌딩의 옥상에서 홍콩누아르의 신세기를 열어젖혔다. 누아르의 어둠을 표백한 <무간도>는 미끄러질 듯 깔끔한 이미지의 표면에서 존재론적인 누아르를 실험했다. 여기선 총보다 휴대폰이, 피보다 시스템이 한수 위다. 시스템은 유리벽의 반사 이미지처럼 정체성을 이중인화하여 각자의 더블이자 환영을 찾도록 내몬다. ‘무간지옥’이라는 표현은 그 무한 수색의 긴장과 피로에 대한 불교적 코멘트다. 너무나 화창한 첨단 도시는 존재의 무상함을 살짝 도금한 역설적인 지옥도인 셈이다. 죽음의 비장미를 생략한 자리에는 매끈한 광택 속에 갇힌 막막한 삶과 순식간에 그 막막함을 끝내는 마침표만 있을 뿐이다.

실로 <무간도>는 인간적 파토스보다 구조적 로고스로 지어진 하이테크 누아르였다. 대칭의 인물군으로 구축된 거울 구조는 내부의 적들이 활약하면 할수록 스스로 내파할 수밖에 없는 체제였다. 거기서의 닮음꼴 자아 찾기는 엘리베이터에 비친 진영인의 거울 이미지가 암시하듯, 나르시스가 죽음의 이미지로 뛰어드는 것과 같다. ‘좋은 사람되기’의 가능성 역시, 흔적도 없이 말소되는 신상기록처럼 체제의 표면에 어른거리는 이미지에 불과하다. 조폭이 경찰로 개종했다고 ‘좋은 사람’이란 확신을 주지 못하듯, 체제는 정체성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선배 장르영화들의 정신적 지존이었던 ‘의리’를 클로즈업하지도 않은 <무간도>는 마초들의 뜨거운 피를 말 그대로 쿨하게 씻어낸 ‘영웅탈색’이었다.

한해가 가기 전에 시리즈의 기세를 뽐낸 <무간도2 혼돈의 시대>는 탁구 치듯 오가던 1편의 교차편집을 좀더 확장하면서 헝클어놓는다. 시간순으로는 1편의 고착된 대칭 이전에 2편의 유동적인 비대칭이 있었다. 2편은 97년 이전의 진영인과 유건명, 그리고 그들의 보스인 황 국장과 한침의 전사(前史)이다. 무엇보다 한침의 보스인 예 회장은 짝수 구도의 인물 배치를 뒤흔든 주역이자, ‘혼돈의 시대’를 대변하는 장본인이다. 대립각을 세우는 황 국장과 예 회장 사이의 인물들은 친구, 동료, 적을 구분하기 힘들 만큼 뒤엉켜 있다. 황 국장이 의리를, 예 회장이 가족애를 대변할 때는 장르의 태생을 느끼게도 해준다. 그러나 구조에서 인물로 포인트를 옮긴다고 2편이 80년대식 숭고를 좇는 건 아니다. 복잡한 권모술수로 반죽된 ‘패밀리’는 자연스레 <대부> 시리즈를 소환하면서, 홍콩누아르가 대충 수습하고 넘어갔던 드라마적 측면을 신경망 같은 가계도와 조직도로 펼쳐놓는다.

이에 따라 복수와 반전의 내러티브는 1편보다 더 자주 관객의 뒤통수를 때린다. 점잖게 생긴 예 회장이 황 국장보다 한수 앞서 던지는 패들은 갱스터나 필름누아르에서 감탄하게 되는 고수들의 경지 그것이다. 동정의 여지없이 스파이를 제거하던 예 회장이 이복동생인 진영인 품에 안겨 죽을 때에야 그도 스파이임을 알게 되는 장면은 ‘브루투스, 너마저!’의 메아리와 같다. 1편처럼 죽음은 갑작스럽지만, 죽음의 순간을 피하지 않는 카메라는 총성과 피, 오열과 분노를 함께 담아낸다. 진영인이 ‘좋은 사람되기’를 희망할 때는 1편에서 유건명이 같은 얘기를 할 때보다 더 순수한 느낌이다. 이런 변화들은 2편에 좀더 짙은 인간미를 불어넣지만, 더 많은 부분들로 분할된 앙상블드라마풍의 누아르가 됨에 따라, 특정 주인공에 과도한 감정을 실어주는 대신 공동체의 변전 자체를 지켜보게 한다.

도일 대신 공동감독인 유위강이 촬영한 2편은 그 변전을 중국반환 전까지의 90년대 홍콩과 겹쳐놓는다. 화면은 다시 어두워졌고, 흐린 날씨가 많아졌으며, 옥상은 노천술집으로, 빌딩은 집과 레스토랑으로 변했다. 유리 표면 같은 질감을 포기한 2편은 별다른 편집과 조작없이 휴대폰과 총이, 테크노 비트와 신파조 하모니카가 두루 섞인 시절을 정직하게 보여준다. 80년대의 화려한 쌍권총이 97년의 다가올 불안을 죽이진 못했던 시절, ‘패밀리’는 죽거나 혹은 이민가거나의 선택에 놓였던 시절, 인간성은 점점 시스템 속으로 구조조정되고 첨단 자본주의가 조금씩 도시 경관을 바꾸던 시절.

이런 과도기 풍경은 90년대의 왕가위가 일상에서 표현하던 것들을 장르적으로 전유한 것과 비슷하다. <무간도2 혼돈의 시대>는 내리막길을 걷던 90년대 홍콩누아르가 당시에 찍었어야 할 것을 지금 와서 찍은 영화다. 1편 같은 선연한 참신함은 없지만, 1편 같은 미래로 정리될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혼돈스런 흐름을 직시하고 거기서 사라져야 했던 것들을 애도하려는 시선이 거기엔 스며 있다. 그건 뒷골목 인생들에도 닥쳐온 어떤 패러다임의 변화를 지극히 우회적으로, 그러나 사실적으로 응시하려는 시도이다. <무간도> 시리즈는 결국 현재의 홍콩누아르가 정리하고 넘어가야만 하는 어떤 결락에 대해, 문턱의 경험에 대해, 오늘의 관점에서 장르적으로 갈무리하려든다. 3편이 기다려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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