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누구나 한때는 인간이었다. 원래 게으르고 탐욕스러운 돼지로 태어난 것은 아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나 사람처럼 살기를 조금씩 포기하는 것이다. 꿈도 없이 다른 인간에게 실망하면서, 모르는 사이에 돼지가 되어간다. 꾸역꾸역 살만 쪄간다.
<붉은 돼지>가 주는 교훈이 있다면 사실 이런 것이다.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가엾은 존재.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모노노케 히메>의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든 1992년작이다. 언제나 그렇듯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작품에서 강조하는 것은 일정한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아이들을 위한 애니메이션.” 그런데 <붉은 돼지> 시절에 미야자키 하야오는 조금 다른 결심을 했던 것 같다. “이 작품은 개인적인 것이며 나 스스로를 위해 만든 것”이라고 공언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세상 물정을 아는 이를 위한 애니메이션이다.
<붉은 돼지>는 우리를 양대 세계대전의 틈새로 안내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20년 말이다. 전쟁의 잔혹함을 잊기 위해 스스로 마법을 걸어 돼지가 된 공군 비행사 포르코 로소가 있다. 그는 무인도에 살며 공적, 즉 하늘의 해적을 소탕한다. 사람들은 그를 붉은 돼지라 부른다. 포르코는 아름다운 여인 지나를 만나 과거를 회상하며 살아간다. 공적은 힘으로는 포르코에게 대적할 수 없게 되자, 부유한 미국인 비행기 조종사인 커티스를 고용하기에 이른다.
결국 커티스와 포르코는 라이벌이 된다. 대결로 비행기가 파손되자 포르코는 우수한 비행기 제작자인 피콜로에게 비행기 수리를 의뢰하고, 피콜로의 손녀 피오와 함께 은신처에 도착한다. 포르코는 여기에서 공적들과 마주치게 되고, 커티스와 공중전으로 승부를 내기로 한다. 치열한 공중전은 결국 맨손의 결투로 이어지고 둘은 단지 사랑만을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주먹다짐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붉은 돼지>는 원래 장편애니메이션이 될 운명이 아니었다. ‘돼지’라는 동물에 흥미를 느낀 미야자키 하야오는 돼지를 스케치하면서 단편이나 습작 정도를 만들 것을 계획했다고 한다. 몇년간 묵혀두었던 작업이 비로소 나름의 형태를 지니게 된 것은 어느 항공사 비행기 승객을 위한 단편애니메이션 프로젝트. 비슷한 시기에 동유럽 내전과 소련의 붕괴 등 정치적인 움직임이 감지되었고 미야자키 하야오는 계획을 급격히 수정했다. 그리고 장편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다. 작품에 스며든 ‘붉은색’의 은유, 파시즘에 관한 언급과 문명에 대한 회의적 시선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오해는 말자. <붉은 돼지>는 정치적인 작품은 아니다. 비행의 모티브와 어느 소녀의 성장 이야기 등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은 그리 변질되지 않았다. <붉은 돼지>가 미야자키 감독의 숨겨진 능력을 보여준다면, 그것은 우화(寓話)의 영역에서 범상치 않은 솜씨를 과시하는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 선악 경계를 넘나드는 한 마리 돼지, 붉은 비행기를 타고 지중해를 날아다니는 돼지 포르코는 멋진 캐릭터다. 누아르 장르의 희화화라고 해도 좋겠다. 마크 실링이라는 비평가는 같은 캐릭터에서 “할리우드 고전영화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며 반가워했다. 역사의 추악함과 개인의 고결함 사이에서 그럴듯한 포즈를 취하는 포르코는, 그리고 <붉은 돼지>는 우화의 다층적 의미를 전달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붉은 돼지>에 대해선 다양한 비평이 있었다. 일본의 비평가 수가 히데미는 “작품의 메타 비평적 구조가 파시즘에 대해 비판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라 논했으며 서구의 헬렌 매커시는 “나이에 관계없이 사람들이 계속 꿈꿀 수 있는 한 이 애니메이션은 적합한 관객을 만날 것”이라며 찬사를 바쳤다.
엔딩 크레딧이 본편만큼 인상적인 경우는 흔치 않다. <붉은 돼지>는 그렇다. “그날의 모든 것이 헛된 것이라고 아무도 말하진 않아/ 지금도 똑같이 다 그리지 못한 꿈을 그리며 계속 달리고 있겠지/ 어딘가에서….” 노랫가락에 맞춰 옛 사진들이 하나씩 나타났다 사라진다. 속깊은 그리움의 표시다. 극히 개인적이며 회고적인 <붉은 돼지> 이후 5년 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일본으로, 중세로, 아이들의 판타지의 세계로 귀환했다. <모노노케 히메>다.
포르코는 하야오의 자화상? - 캐릭터 열전애니메이션의 주인공. 지중해의 공적들을 상대로 하고 있으며 공적들이 두려워하는 존재이다. 붉은색 비행기를 타고 지중해 연안을 돌아다닌다. 한때 이탈리아군의 유능한 비행사였으나 스스로 마법을 걸어 돼지가 되어버렸다. 오랜 친구인 지나를 사랑하고 있으며 겉으로 내색하지 않는다. 본명은 마르코이며 포르코는 공적들이 그에게 붙인 별명이다. 어린 시절부터 비행을 즐겼고 애니메이션 중간에 그의 ‘인간’으로서의 얼굴을 보이기도 한다. 성인 관객을 위해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들어낸 캐릭터.
아드리아노 호텔의 마담. 모든 비행사들이 동경의 대상으로 삼는 여인이다. 그녀의 노래를 듣기 위해 하늘의 남자들이 가게를 방문하곤 한다. 한때 여러 비행사들과 결혼한 경력이 있지만 모두 죽어버린 탓에 외롭게 살고 있다. 포르코와는 친구 사이며 지나 역시 포르코를 사모하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지나에 대해 “남성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감정과 소망을 밝히길 꺼리지 않는” 캐릭터라고 설명했다.
쾌활하고 구김없는 성격의 비행정 정비사. 수리공장의 손녀로, 어리지만 비행기에 대해 해박한 지식과 기술을 지니고 있다. 고장난 포르코의 비행기를 그녀가 수리하게 된다. 클라이맥스에 포르코와 커티스가 그녀를 사이에 두고 대결을 벌인다.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에 나오는 전형적인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