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은 초능력을 믿지 않는다. 적어도 추리소설 속에서는 그렇다. 누군가가 밀실에서 죽었다면, 거기에는 트릭이 있다. 과학으로 증명되지 않는 염동력이나 바늘을 온몸에 꽂은 인형의 주문에 의해 살인이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원래 추리라는 장르는 기괴한 미스터리의 범죄를 ‘이성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의 수사관들은 이러한 신비주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그들도 수사가 난관에 봉착하면, 어떤 초자연적인 능력을 이용해 범인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가진다. 이러한 욕망을 실현시켜주는 만화들도 없지 않다. <미스터리 극장 에지>는 범행 현장에 남은 물질에서 생각의 잔상을 읽어내는 사이코메트리로 범인을 유추한다.
<심리수사관 아오이>에서는 범죄의 마음을 품은 자의 얼굴에서 괴물의 형상을 읽어내는 소년의 도움을 받는다. 이 초능력을 이성과 과학의 힘으로 만들어내면 안 될까?
시미즈 레이코의 새 연재작 <비밀>은 미래의 언젠가에 가능할지도 모를 범죄수사의 방법을 말해준다. 멀지 않은 미래의 어느 때에 죽은 자의 뇌를 스캐닝해서 읽어낼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된다. 보존 상태만 좋다면 그의 뇌에 기록된 시각 영상을 최대 5년까지 거슬러올라가 복원해낼 수 있는 것이다. 범죄수사에서는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야말로 죽은 자가 벌떡 일어나, 범인의 얼굴은 물론 범행의 방법까지 똑똑히 그려내주는 것이다. 몽타주 같은 불완전한 수사의 기술은 히스토리 채널에서나 볼 수 있는 게 되어버릴 거다.
만화의 중심이 되는 ‘법의 제9 연구실’은 바로 이 ‘MRI 수사’를 통해 범죄를 해결하는 특수한 부서이다. 엘리트 중의 엘리트들만이 모여 있는 통칭 ‘제9’가 특별한 취급을 받는 이유는 단지 이 부서가 우주 스테이션급 설비와 같은 고급 기술을 쓰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생각해보라. 피살자에게 목을 조이는 범인의 광포한 손길, 죽일 듯이 죽이지 않는 쾌락 살인범의 음흉한 미소, 공포에 사로잡힌 자살자의 눈앞에 떠오르는 유령의 허상…. 그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잔혹한 장면을 끊임없이 보아야 하는 최악의 직업을 가지고 있다. 앳된 소년의 외모를 지닌 마키 경시정은 일본 범죄사에서 최악의 기록을 남긴 28인 소년 연속 살인범의 뇌를 들여다보고도 정상인으로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으로, 그를 흠모해 이 부서에 배치된 신참 아오키와 콤비가 되어 구역질나는 범죄의 하수구로 들어간다.
1980년대부터 소녀 SF만화의 주축으로 자리잡아온 시미즈 레이코는 뇌의학이라는 현대 과학의 가장 중요한 테마를 가져와 새로운 실험에 돌입하고 있다. 이미 몇몇 만화가들이 <사토라레>와 <영원한 안식처> 등을 통해 생각의 염탐, 기억의 조작과 같은 뇌의 문제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펼쳐내고 있는 가운데, 시미즈의 단단하고도 섬세한 SF적 상상력이 어떤 장면들을 펼쳐낼지 귀추가 주목된다. 아마도 다른 만화들보다는 <비밀>의 설정이 좀더 과학적 근거가 단단해 보이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 과학을 통해 신비로운 환상으로 접근하는 일도 가능하다는 점이다. 착각이든 망상이든 ‘진짜로 유령을 본 사람’의 뇌에는 그 장면의 기억이 남아 있을 것이다. 유아기에 학대받은 소년의 영상은 부모와 어른이 머리에 뿔을 달고 있다. 엄마는 소년에게 눈과 귀가 들어간 식사를 건네준다. 귀는 아직 움직이고 있어 잘 잡을 수 없는데, 엄마는 젓가락을 깨작거린다고 잔소리한다.탐미적이지만 끔찍한 장면들은 <다중인격탐정 사이코> 못지않은 잔혹의 세계를 체험하게 해준다. 그러나 시미즈 특유의 능청스러운 유머가 그 사이사이에 잘 배어 있다. 신입 수사관은 자살하기 직전의 소년이 보게 되는 유령의 형상을 보고 어쩔 줄을 모르는데, 거기에 선배 수사관의 농담이 더 큰 공포를 얹어준다. “이런 걸로 뭘 놀라는 거야? 이 녀석이 자살할 때까지는 3시간이나 남았어. 그러니 여기부터가 클라이맥스야. 생각해봐. 16살의 건장한 불량아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어질 만큼의 영상이라구.” 이런 말을 듣는 동안, 선배 수사관은 마치 묘지를 떠도는 유령처럼 변신하고 있다.
그러고보니 드는 생각이 있다. 만화란 게 원래 사람 눈에 보이는 순간적인 환상의 모습을 자유분방하게 그려내는 매체다. 반대로 만화를 열심히 보는 독자들은 일상 생활에서도 상대방의 모습을 만화처럼 보게 되는 환상의 능력을 개발한다. 그러니까 범인의 팔이 갑자기 기생수처럼 솟아나 자신을 찌른다든지, 범인의 둥근 얼굴이 도라에몽으로 보인다든지 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열렬한 만화 독자들의 뇌를 들여다보고 이해하려면 수사관들이 꽤나 골치를 앓아야 할 것 같다. 이명석/ 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 www.sugarspr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