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릭 저먼을 맨 처음 만났던 건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도서관에 있던 <가든> LD를 봤을 때였다. 예전에 본 적 없던 새로운 형식에 가장 놀랐고, 화려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우울한 분위기가 너무 좋았고, 회화의 아름다움이 영화에 이런 식으로 녹아들 수 있다는 점에 다시 한번 놀랐다. 그뒤로 데릭 저먼에 대한 관심에 <카라바지오>와 <에드워드 2세>를 찾아봤었는데, <가든>과는 다르게 너무도 정적인 이 두 영화는 사실 큰 감동을 안겨주진 않았었다.
그리고는 잠시 잊고 있었다. 그동안 난 군대를 다녀왔고, 3년이란 세월은 학교에 많은 변화를 안겨주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반가운 변화는 지하실에 새로 생긴 영상자료실이었는데, 그곳에서 다시 되찾은 영화가 바로 <카라바지오>였다. 격한 생애를 살다 마감한 그의 인생사가 무척이나 가슴 아프게 다가왔고, 그의 광적인 행동이 모두 이해될 정도로 카라바지오란 화가는 강렬히 내 가슴속에 들어와버렸다. 물론 난 바로 도서관으로 향해 그의 그림들을 접하기 시작했다. 화집으로 만난 카라바지오는 영화에서보다 훨씬 강렬한 화가였다. 그림에 대한 지식 하나 없이, 단지 보여지는 것만이 주는 강렬함으로 이렇게까지 날 떨리게 만드는데 직접 보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는 정말 막연하게 이런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러다 지난해 간 유럽여행에서 그의 그림 <메두사>와 <바쿠스>를 만났다. 유혹적인 눈빛, 빛은 바랬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색채, 역동적인 육체와 움직임. 카라바지오는 주위의 어떤 그림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강렬함으로 내 시선을 압도했다. 난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특히 복도 밖에서 바라본 <바쿠스>는 더욱 유혹적이었는데, 관람객 사이로 보이는 <바쿠스>의 한쪽 시선은 반쪽이어서 더욱 애절한 듯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매력을 발산하며 내 가슴 한구석에 계속 메아리쳤다.
그뒤 또다시 사는 데 바빠 한동안 그를 잊고 있었다. 학교를 다니고, 졸업을 하고, 뭔가 변할 거라 생각했던 내 삶에 여전히 뿌연 안개가 흩뿌려져 있던 동안 난 카라바지오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얼마 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렸던 <데릭 저먼 회고전>이 바로 그 자리였는데, 이때 만난 데릭 저먼의 영화들은 여행에서 본 카라바지오의 그림들과 오버랩되면서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특히 <에드워드 2세>는 더욱 그랬다. 밝은 곳은 화려하게 부서지며 어두운 곳은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심연을 드러냈고 인물의 라인은 화려하게 살아 있었고, 표정이 보이도록 은은하게 뿌려진 필은 때에 따라 색을 더하며 인물의 감정까지 만들어갔다. 아마도 계산하고 만든 듯한 세트 벽의 질감은 빛과 완벽하게 어울려 빛의 신비감을 더해주었고, 밖에서 들어오는 설정의 빛을 완벽하게 흡수하였다. 어쩌면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는지….
극장을 나와 싸늘해진 공기를 마시며 잠시 예전에 처음 봤던 <에드워드 2세>를 떠올렸다. 그때는 별로 재미있게 보지 않았었는데, 내 안의 무언가가 이렇게 만든 것인지…. 순간 세월이 흘렀고, 내가 변했고, 환경이 변했음을 느꼈다. 그래도 그런 변화의 순간 속에서 커다란 방점을 찍어준 카라바지오란 화가가 있기에 이 자리에 내가 서 있을 수 있었으리라. 순간의 격세지감을 느끼며 내 인생에 몇번 더 등장하게 될 방점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