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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화선><올드보이>의 배우 최민식 [2]
사진 오계옥김혜리 2003-12-06

송강호씨도 우진 역을 탐냈다고 들었다. 이우진 역이 그토록 매력적인 까닭은. 오오, 이우진은 너무나 훌륭한 역이다. 슬픔과 순정, 잔인무도함과 용의주도함까지 캐릭터의 폭이 이보다 넓을 수 없다. 우진은 누나를 잃은 뒤 삶이 정지된, 기형적인 인간이다. 그는 수십년간 “우리를 파멸시킨 놈”만 생각한 인간이다. 햄릿 같기도 하고 에드워드 노튼처럼 여린 듯 무시무시한 악마성을 가진 배우에게 어울리는 역이다. 사실 박찬욱 감독에게 “내가 우진을 하고 오대수를 캐스팅하는 게 어때요?”라고 간곡히 제의했다. 그런데 2∼3일 고민하더니 거절하더라. “선배가 우진을 하면 오대수는 신구 선생이 하나요, 최불암 선생이 하나요?”라며. 나도 살 쪽 빼고 스킨케어받으면 할 수 있다고! <올드보이2>가 나오면 이우진 아닌 이우신이라도 하고 싶다.

당신의 얼굴과 연기에는 감정과 생각을 그저 전할 뿐 아니라 관객이 자기 것처럼 여기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일정한 경지에 오른 그 능력을 마음껏 펼친 영화가 <파이란>이었다. 대조적으로 다음 영화인 <취화선>의 연기는 많이 제어받았던 것으로 안다. 연기자로서 하나의 절정을 경험한 다음 만난 <취화선>이 어떤 전환의 계기가 되진 않았을까. <취화선>의 연기는 틀 안에 갇혀 있다. 내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수도, 펼쳐서도 안 되는 작품임을 다 알고 시작했지만 촬영 초반에는 본능적으로 부대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작품에서 표현될 내용을 견고하게 짜놓고 연출하는 임 감독님은 오원이 매향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간단한 숏에서도 더 깊게 꺾는 것도, 돌아본 다음 표정을 짓는 것도 금하셨다. 처음에는 갑갑해하다가 문득 생각했다. 그래, 어차피 여기서 여기까지만 고개를 움직일 수 있다면 그 안에서 자유를 찾아보자. 부대끼려 하지 말고 임 감독님이 원하는 것을 100%, 200% 보여드리자. 그러다보니 중반 이후에는 감독님도 달라지셨다. “저놈 어떤 놈인지 알아봐야겠다” 생각하신 듯, 블로킹만 주고 내가 하는 양을 보아주셨다.

<올드보이>, 스타일화된 실험적 연기

<취화선>에서는 영화와 배우가 힘을 겨루는 긴장감이 있는 반면 <올드보이>는 영화와 배우가 의기투합한 느낌을 준다. 다른 배우도 매우 아름답게 잡긴 했지만 <올드보이>는 최민식에 관한 한 CF에 가까워 보인다. 마치 영화가 배우에게 아부하는 것처럼. 박찬욱 감독은 어떤 감독보다 당신이 얼마나 미남인지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지금까지는 연기 방법론을 물으면 “그저 숏 안에 들어가서 산다”라고 답했는데 이번에는 영화 메커니즘이랑 같이 연기를 생각한 것 같다. <올드보이>에서 당신은 <파이란>에서처럼 자유롭지만 좀 다른 종류의 자유다. 그렇다. 이번 작업 스타일은 몰입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실험극을 하는 것 같았다. 물론 애원하는 격정적 신의 연기는 당연히 몰입을 했지만, 기본적 리얼리티와는 거리가 있는 스타일화된 인물이어서 모든 것을 기준없이 만들어냈다. 몸이 피곤해서 그렇지 흥미로웠다. 처음에는 답답했던 것이 나중에는 만들어내는 재미에 빠졌다. 정답이 없으니 내가 만들어내는 오대수가 바로 현실의 오대수였고 모든 것이 가능했다.

클로즈업도 클로즈업이지만, 관객을 자극하는 ‘큐’ 구실을 하는 편집도 오대수의 움직임이 깊은 인상을 남기도록 밀어주는 느낌이었다. 영화쪽도 클로즈업, 내레이션으로 당신의 얼굴과 음색이 가진 강점을 백분 이용했고. 애초에는 내레이션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런데 후시녹음하는데 내레이션이 더 많았으면 하더라. 오대수가 하긴 원래 말이 많은 놈이니까 그러자고 했다. (웃음) “그때 그들이 15년이라고 말해줬더라면 견디기 쉬워졌을까?”는 원래 있던 내레이션이지만 옆방 아저씨 젓가락 이야기나 “나갔는데 52층이면 어떡하지?”처럼 유머러스한 독백은 모두 없던 것들이다. “10년 동안의 상상훈련, 과연 쓸모가 있을까?”도 두개 중에 미도가 나오는 장면의 내레이션은 뒤에 추가된 거다.

결국 카메라의 눈 또는 연출자의 눈으로 자신을 볼 기회가 많았던 영화인 셈인가. 나로부터 뚝 떨어져 나를 보았다. 포즈 잡는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된 듯한 작업이 많았다. 그리고 워낙 박찬욱이라는 유능한 사람이 펼쳐놓은 판이 재미있어서 그 판을 갈아엎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야, 재밌다. 이걸 더 하면 더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식의 작업이었다.

배우는 한시적인 삶에 대한 인식이 뚜렷해야

<올드보이>의 실제 촬영 순서는. 일식집 장면과 담배 피우는 깡패들과 싸우는 장면은 부산에서 초반에 찍었다. 그리고 우진의 펜트하우스신을 양수리에서, 감금방신을 주로 파주 세트장에서 찍었다. 맨앞의 파출소 장면과 감금 직후 모습을 마지막에 찍었다.

그건 체중을 감량했다가 다시 찌워야 하는 일정 아닌가. 본래 다시 찌울 시간이 한달 주어지도록 되어 있었는데, 태풍과 장소 섭외 문제로 스케줄이 어그러져 열흘 만에 8kg을 찌웠다. 소식과 운동에 중독된 상태에서 갑자기 폭식을 해 위장병도 얻었다.

3분 롱테이크로 간 감금방의 장도리 액션신은 처음에는 잘게 쪼개질 계획이었던 걸로 안다. 원래는 카메라 2대를 쓰고 와이어도 쓰고 특수효과도 집어넣어 뢴트겐 사진으로 뼈가 부러지는 것도 보여줘서 재미를 충족시킬 요량이었다. 종일 그렇게 찍고 이튿날 갔더니 고정에 같은 사이즈로 끊지 말고 찍자고 하더라. 그래서 “왜요? 제가 뭘 잘 못했나요?” 했더니 “오대수가 외로워 보여야 한다. 시각적 효과와 재미보다는 홀로 외롭게, 그것도 이우진도 아닌 엄한 놈들하고 홀로 외롭게 싸우는 대수의 정서가 이 신의 목표지, 화려한 테크닉이 목표가 아니다!” 그러기에 또 한번 탄복했다. 맞다! 그러나 막상 하려니… (웃음) 끝에 삑사리 한번 나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다.

‘쟁반 노래방’ 같았겠다. 바로 그거다. 지금 편집된 것은 열여섯 번째인가의 테이크다. 지쳐 보이는 모습은 연기가 아니다.

마지막 장면에 대수가 지은 미소가 최대 미스터리다. 분명 기억을 지닌 자아는 방금 사라졌는데, 미도를 만난 대수의 표정은 잊은 자 치고는 너무 복잡하다. 배우 입장에서는 어떤 생각을 했고 감독과는 어떤 협의를 거쳐 설정했나. 기자는 어떻게 봤나.

잊지 않은 얼굴이라고 봤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연기했다. 관객이 “쟤 잊은 거야? 기억하는 거야?” 하는 답답한 상태로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렇게 넘기기에는 최면술이 전반부 플롯에서 너무 확고한 기능을 하지 않나. 최면은 아주 중요한 모티브로 그로 인해서 이우진의 복수가 가능해졌고 중요한 장치다. 그것을 영화의 내적 리얼리티로 받아들이긴 하지만, 오대수가 모든 여정을 끝내고 자기와 미도 앞에 펼쳐진 생의 시간을 바라보는 순간에는 산맥 같은 험난함과 막막함이 있다. 우진은 대수가 청자를 다시 찾아올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아사무사한 답답함이 더 큰 형벌이고 복수다. 죽지도 못하고. 참 잔인한 놈이다.

예전에 배우는 남의 혼을 빌려 사는 사람으로서 한시적인 삶에 대한 인식을 뚜렷하게 가져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변함없는 생각이다. (짧은 침묵) 제사를, 판을 벌이려면 정성껏, 진짜로 준비해야 한다. 가짜로, 건성으로는 안 된다.

‘선수’라는 표현을 즐겨 쓰는데. 탁 하면 턱 받아주는 사람들이다. 요즘 <역도산> 준비하는 설경구가 만날 전화해서 “형, 우리 꼭 이렇게 살아야 돼?” 하며 앓는다. “네가 한다고 한 거잖아. 네 무덤 네가 팠지!” 실존인물이니 부담스러울 거다. 레슬링도 어설프면 안 되고. 반칙왕과는 다르다. (웃음) “열심히 해라. 난 이제 놀란다.”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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