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다> 본 건달, 한 사랑의 뒷모습을 응시하다
프리다 칼로의 남편 디에고는 당대 최고의 화가지만 바람둥이로, 결혼에 대한 책임감 따윈 전혀 없다. 또, 자신의 일과 쾌락 이외에 남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런 태도는 아내라고 예외가 아니어서, 처제를 성적 노리개로 삼는 일까지 서슴지 않는다. 이쯤 되면, 디에고는 누가 봐도 나쁜 놈이다. 그런데 왜 그 명민한 프리다는 디에고의 그런 만행에도 떠나지 않았을까? 그녀가 너무나 헌신적인 성녀이어서?
디에고는 한 가지 걸출한 재능이 있다. 사물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타고난 화가의 눈이다. 그런데, 남들은 다 있는 한 가지 기재가 빠져 있다. 인내심. 그중에서도 특히 심심한 걸 못 참는다. 문제는 그가 그림 그리는 것과 여자 꼬시는 일 이외에는 다 심심해 한다는 거다. 디에고의 경우는 정도가 심하지만, 타고난 재능은 성격에 그늘을 드리우게 마련이다. 사물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눈과 심심함을 못 견디는 성격은 재능의 양면이다. 재능이 깊어 눈에 뵈는 온갖 사물에서 아름다움을 찾는다면 그거 탐하느라 심심한 거 굳이 참을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디에고의 삶은 그림과 여자를 통해 아름다움을 탐하는 것 이외에는 없다. 어떤 일을 해도 그는 그림에 몰입하거나 여자를 유혹할 때처럼 한다.
그에게 중요한 건 행위의 지향이 아니라 행위 자체의 밀도다. 이런 캐릭터는 혁명을 해도 로맨티시즘이 없으면 그 상황을 못 견딘다. 각박한 현실주의자 스탈린에 대한 혐오와 이상주의자인 트로츠키에 대한 숭배의 극단적 분리는 그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는 아무리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있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결혼생활의 일상을 심심해서 견디지 못한다. 그러나 그녀가 병들어 더이상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시점에 홀연히 구세주처럼 나타난다. 그는 격정의 서사에 본능적으로 반응해서 행복한 결혼의 일상보다 차라리 죽음 직전의 연인을 위한 헌신적 역할을 더 즐거워한다. 그는 사랑도 혁명처럼 격정적으로, 혁명도 사랑처럼 로맨틱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한다. 그는 무언가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감당할 수 없는 새로운 일을 끊임없이 만든다. 그리고 거기서 마침내 길을 잃어버린다. 자신의 삶의 방식이 재능 때문인지 탐욕 때문인지 그는 더이상 자신할 수 없다.
디에고의 캐릭터는 난삽하다. 벤야민의 에세이 <파괴적 성격>에 나오는 한 대목이 그의 캐릭터를 잘 요약한다. “파괴적 성격은 단 하나의 구호만을 알고 있는데, 그것은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파괴적 성격은 단 하나의 행동만을 알고 있는데, 그것은 공간을 없애는 일이다.” 그럼에도 디에고는 프리다와 정신적으로 교감하는 공간은 마지막까지 없애지 않았다. 사람들은 디에고와 프리다의 결혼을 코끼리와 비둘기의 만남으로 비유하고, 유효기간 6개월 이내로 내기했다. 하지만 둘은 마지막 순간을 함께한 셈이니 그들이 틀렸다. 디에고와 프리다를 묶어준 끈은 어디에 숨어 있었을까?
나는 둘의 관계를 이렇게 봤다. 프리다에게 디에고는 자신을 고유한 텍스트로 해석해준 유일한 사람이다. 그림을 보고 미처 자신도 알지 못하는 꿈과 열정을 정확하게 읽어서 한 인간으로서의 의미와 서사를 부여해준 인물이다. 무수한 고통을 주었음에도 프리다가 디에고를 포기하지 못한 것은 그녀가 꿈꾸는 삶을 지켜보고 평가해줄 유일한 관중이 디에고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프리다 자신도 소통의 깊이와 관계의 밀도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꿈과 재능을 읽어주는 디에고의 눈을 필요로 했다.
그렇다면 디에고는? 디에고에게 프리다는 자신의 선의를 환기시켜주는 유일한 사람이다. 다른 여자들은 디에고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에 열광하고 그 무책임에 실망하는 부류들이다. 하지만, 프리다는 디에고를 바람둥이로 만드는 그 재능의 최초의 선의를 응시했다. 때문에, 디에고는 프리다를 통해서만 자신의 선의를 확인할 수 있었다. 현실적인 영화와 쾌락의 늪 속에서 프리다는 디에고가 자신으로 귀환하는 유일한 통로였던 것이다. 그러니, 두 사람의 사랑은 마음에 비둘기를 키우는 코끼리와 머리에 코끼리를 꿈꾸는 비둘기의 만남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서로 운명적인 사랑 속에서 프리다는 그렇게 고통을 받았을까? 운명적인 사랑의 남성형 인생과 여성형 인생은 어찌 이리 다를까? 프리다는 결핍으로 인해 고통받고, 디에고는 과잉으로 스스로 상처를 주고…. 운명적인 사랑의 불 속에서도 타지 않고 남아 있는 게 권력인가. 남재일/ 고려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