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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보이>의 진부한 포르노적 욕망
2003-12-04

에둘러서 말할 필요 없다. 오이디푸스는 뭐하러 들먹이는가. 한껏 무게잡고 말해봐야 ‘원형적 욕망’같은 것인데, 깨놓고 말해서 <올드보이>에서 그것은 ‘포르노적 욕망’이다. ‘나쁜 남자’의 경우도 그랬지만 남자감독들은 참 편하다. 배설물도 예술로 격상시켜주는 재주를 가진 수많은 자발적 전문가 군중을 동원할 수 있어서 말이다.

작품의 완성도를 놓고 말하자는 게 아니다. 최민식의 연기와 박찬욱 감독의 연출력은 여전히 훌륭한 수준이니까. 그 점에 대해서 불만 없고, 불만을 논할 만큼 영화에 전문적인 식견을 가진 것도 아니다. 내가 불편하고 짜증나는 것은, 성별에 따라 완벽하게 상반되는 반응에는 무감한 사람들과, 뻔한 남성적 욕망이 마치 예술가적 소양인 것처럼 추앙되는 것에 대한 역겨움 때문이다.

<올드보이>에는 두가지 종류의 근친상간 관계가 등장한다. 남동생 대 누나, 아빠 대 딸. 우진과 그의 누나가 교실에서 섹슈얼한 관계를 맺는 장면. 누나는 계속 주저하고, 남동생은 카메라를 든 채 좀 더 자극적인 자세를 만들어줄 것을 요구한다. 누나는 계속 ‘앙탈’을 부리다가 결국 스스로 옷을 벗고, 급기야 거울로 남동생이 자신의 가슴을 애무하는 장면을 관음한다. 오대수가 자신의 딸 미도와 성관계를 맺는 장면. 딸은 마치 숫처녀인 것처럼 아파하다가 품에 안겨서 “아저씨가 좋으면 나도 좋아” 비스무리한 말을 중얼거린다.

너무나 전형적인 남성적 욕망. 그 대상이 근친이라는 점에서 제도권에 수용되지 못한 채 음지로 숨어든, 포르노에서나 번창하는 그런 욕망들. 이미 육체적으로 성숙했으나 늙지는 않은 누나와 이제 막 다 자라 성인이 된 딸이라는 ‘사회적 대상’에 대한 남성적 욕망들. 관계·시선·성관계가 진행되는 순서, 태도, 사용되는 도구, 게다가 왜 자살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자기희생적으로 신비화된 여성 캐릭터에 이르기까지, 단 한 가지도 다르지 않은 진부한 포르노적 욕망. 그것이 남성들에게는 판타지의 일부분일지는 모르겠지만, 여성들에게 그것은 악몽 같은 것이다. 말을 조금만 바꾸면 가부장인 권위적 아버지와 음흉한 눈빛으로 번득거리는 사춘기의 남동생인 그들. 그들과의 성관계란 여성들에게 욕망이기는 커녕 폭력이거나 폭력에의 위협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의 2002년 상담통계에 의하면 전체 성폭력 상담 건수 중 13%가 친족에 의한 성폭력이다.

근친상간에 관한 인간의 도덕은 시대에 따라 변해왔던 것이니 그것 자체가 옳으니 그르니 하는 것을 따질 생각은 없다. 그러니 도덕적으로 박찬욱 감독을 비난할 일도 없다. 바라건대, 부디 이 차이들을 알기나 하자는 것이다. 알고 나서도 영화를 그렇게 만들 것인지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미스테리 액션드라마’라니. 애꿎은 데에 복수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정당화시키고(이우진), 혀를 자르며 오버하는 것으로 복수의 제물일 뿐이었다는 듯 도덕의 가면을 쓰고(오대수), 자가 최면을 걸어놓고 제 욕망은 고스란히 가지고 가는 식으로 남성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일(엔딩)은 그만두자는 말이다. 그럴 거면 차라리 ‘미스테리 남성-섹스판타지’라고 이름을 붙이란 말이다. 변형석/남성페미니스트모임 MenIF 회원 dcyborg@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