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이사벨 아옌데는 1973년 9월11일은 “내 삶을 도끼로 두 동강낸 것과 같았다”고 썼다. 그녀는 칠레 민중이 ‘동무 대통령’이라고 불렀던 아옌데의 조카였고, 9월11일 일어난 피노체트의 쿠데타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중 한명이었다. 그날 이후, 이사벨 아옌데에게 “글쓰기란 항상 생존의 연습”이 되었다. 과거를 돌아보는, 잃어버린 것들을 되살리는, 생존으로서의 글쓰기. 아옌데 정부에 참여한 또 한명의 칠레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도 회고록 <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에서 비슷한 경험을 털어놓았다. 수치를 느끼며 달아난 그는 숨어 있던 은신처 서가에 꽂힌 책들을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말했다. “사람들이 읽고 생각하고 내면에 품고 있는 것들은 그렇게 쉽사리 지워질 수 없다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다…. 이렇게 해서 과거는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도르프만은 과거를 감당하지 못해 죽음으로 뛰어들거나 자살해버린 동지들과 달리 아직도 살아 있다.
도르프만은 영화 <시고니 위버의 진실>로 만들어진 희곡 <죽음과 소녀>, 소설 <우리집에 불났어> <마누엘 쎈데로의 마지막 노래> 등의 작가다. 그는 파블로 네루다를 잇는 재능을 지녔다고 평가받았지만, 생의 대부분을 영어와 스페인어 사이에서 갈등한 작가이기도 했다. ‘삶과 언어’라는 제목의 장(章)들에 수록된 그 방황과 정착, ‘죽음’의 장들에 수록된 9월11일 이후 몇달 동안의 기억이 <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를 잉태한 근원이었다.
도르프만은 아장거리던 두살 무렵 아르헨티나를 떠나 미국으로 이주했다. 사회주의자였고 한때 공산당원이기도 했던 아버지가 우파의 박해를 피해 망명했기 때문이었다. 느닷없이 낯선 세계로 던져진 어린아이. 그 아이는 뿌리뽑힌 삶에 반항하다가 어느 순간, 스페인어를 잊고 영어로만 말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영어가 자기의 언어가 되었다고 믿고 있을 때, 그의 가족은 매카시즘을 피해 또다시 칠레로 망명해야만 했다. 모국어가 두 가지라는 사실은 어떤 이들에게는 복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작가가 되고 싶어했던 도르프만은 그렇게 쉽게 경계를 넘을 수 없었다. 그는 가난한 남미를 거부하면서 혼자 영어로 글을 썼고, 미국에서 보내온 사탕을 먹고 잡지를 읽으면서 떠나온 고향을 그리워했다. 고통스러운 각성을 거쳐 라틴아메리카 청년으로서의 자신을 받아들인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온전한 언어란 영어였다. 그러나 누구와도, 함께 거리에서 싸우는 친구나 스페인어를 사랑하게 해준 연인과도, 자신이 쓴 글을 읽고 교감을 나눌 수는 없었다. 그들은 영어를 할 수 없었고 증오했기 때문에. 도르프만은 하나의 언어로 말하고 생각하기 위해선 다른 언어를 망각 속에 묻어두어야만 했던 것이다. 적대적이고, 서로를 용납하지 않는 남과 북. 그 갈등은 영어와 스페인어의 싸움이기도 했다. 도르프만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생존으로서의 언어’(Language of Survival)를 용납할 수 있게 된다.
이 ‘삶과 언어’의 장들 사이에는 ‘죽음’이 있다. 도르프만은 9월10일 아옌데가 있는 모네다궁에서 당직을 서야 했다. 그러나 그는 몇 가지 우연이 겹쳐서 친구와 당직을 바꾸었고, 그 친구는 수천명의 칠레인들과 함께 경기장에서 총살당했다. 쉬지 않고 도망치면서 도르프만은 수없이 자문한다. 나는 왜 살아남았을까, 나는 왜 아옌데와 함께 죽지 못했을까. 단 몇달이 수십년 삶의 기억과 맞먹을 만한 비중을 갖게 되었는데도, 도르프만은 격하거나 감상적으로 그 시간을 표현하지는 않는다. 울림을 갖는 문장은 매우 단순하다. 누군가는 살아남아 우리의 이야기를 전해야 했어. 우리 모두를 위해 살아남아, 칠레를 사랑한다면. 아옌데의 딸 띠따는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9월11일에 모네다궁을 떠나야 했고, 결국 아버지의 죽음 속에 함몰돼 자살했다. 그러나 도르프만은 아옌데가 다른 이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고 믿기로 마음먹었다. 영어와 스페인어 사이에서 화해하고, 글쓰는 일을 멈추지 않기로 결심하면서, 살을 도려내는 것 같은 그의 회고록은 끝을 맺는다.
<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는 도르프만의 기억인 동시에 그가 행한 모든 실험의 결과이기도 하다. 도르프만은 회고록에 기록된 기억이 순수하다고 강변하지 않는다. 그 기억은 어느 정도 윤색됐고, 또 어느 정도는 허구가 섞여들기도 한다. <우리집에 불났어>에 담긴 몇몇 단편들이 그런 것처럼, 도르프만은 허구가 현실에 영향을 끼치는 순간에 주목해왔다. 보이지 않는 적을 상상하며 공포에 시달리는 <우리집에 불났어>의 어린 소년이나 소설 한편이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독자>의 검열관, 상상으로 자신이 보지 못한 현실을 재구성하는 <대륙횡단>의 조직원. 그들은 허구와 현실의 양분법을 무너뜨린다. <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는 회고록이면서도, 그의 소설들과 비슷하다. 그가 경험한 방황과 공포는 그의 마음속에서 자라날 때 가장 치명적이지만, 또 희망은 허구 속에서 더 끈질긴 생명을 가지기도 한다. <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는 삶과 죽음 모두를 납득해가는, 재능있고 용감한 한 작가의 매혹적인 회고록이다.김현정 parad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