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인생은 가식을 벗고 진실한 자신으로 돌아가는 과정일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평생 걸려야 겨우 도달할 만큼 인간이 가식과 허영을 벗어던지기란 어려운 일 아닌가. 이번에 소개하는 단편애니메이션 <투란도트>는 가식을 벗고 진실한 자아와 마주했을 때의 환희를 모처럼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유정아의 <투란도트>는 어마어마한 자본을 들인 장이모의 <투란도트>와 비교하면 초라하게 느껴질 수 있는 14분 영상이다. 언제나 웅장하고 화려하게 펼쳐졌던 이 유명한 오페라를 별다른 배경도 없이 간단한 흑백 드로잉으로 처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설의 중국이 해저세계로, 투란도트와 칼라프가 문어와 키싱구라미로 바뀐 마당에야. 그뿐인가. 이 작품은 청각적으로도 새로운 시도를 했다. <공주는 잠 못 들고>를 비롯한 몇곡이 흐르기는 하지만, 오페라를 원작으로 하는 작품이라기에는 대체로 ‘조용’한 편.
관객을 단숨에 압도시킬 수 있는 시각적, 청각적 효과를 굳이 사양하고 작가가 선택한 것은, 움직임을 통한 감정 전달이라는 기본기다. 늠름하고 잘생긴 칼라프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작고 코믹한 물고기 키싱구라미가 시간이 흐를수록 멋있게 보일 수 있는 건 애니메이션이 아니고는 쉽사리 달성할 수 없는 성과다. 공주의 허위의식과 차가움, 자존심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수많은 문어다리가 이용됐다. 공주의 화려한 머리로 묘사된 이 다리들은 보잘것없는 키싱구라미가 수수께끼를 모두 맞히자 그를 죽이라고 속삭이기도 하고, 각종 술수로 공주를 부추긴다.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공주가 키싱구라미의 키스에 진실한 사랑을 느끼고 허위의식을 벗어던지자 화려함을 상징했던 문어다리들이 사라지면서 늘씬한 공주가 작고 귀여운 키싱구라미로 변한 장면이다. <슈렉>의 피오리나가 뚱뚱한 모습으로 변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놀라운 것은 그야말로 180도의 변신이기 때문이다.
2003 동아LG국제만화페스티벌에서 장려상과 신인감독상을 수상한 <투란도트>는 올해 완성된 따끈따끈한 작품이다. 이 단순한 흑백 드로잉 화면에서 포인트가 되는 것은 작가가 직접 쓴 한글 자막이다. 특히 한국인이 아닌 관객에게는 더욱 그럴 것이다. 더빙은 영어로 이루어졌는데, 칼라프 역의 키싱구라미의 목소리는 오페라에서 주인공 테너만큼 큰 역할을 담당한다. 자신을 비웃는 공주 앞에서, 그 우스꽝스러운 입술로, 당당하고 떳떳하게 의견을 밝히는 칼라프의 목소리는 코믹한 외모를 압도하고 관객마저 매력에 빠져들도록 하는 이유가 된다.
원작과 비교하면 등장인물도 대폭 줄고, 배경도 최대한 단순해졌다. 푸치니 특유의 비극적 캐릭터인 여자노예 류가 등장하지 않은 건, 이유없는 희생을 줄였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작가가 원작의 화려함을 사양하고 소박한 흐름을 선택한 것은 화려한 문어머리 치장을 내던지고 키싱구라미로 변한 투란도트의 변신과 일맥상통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작과 변함없는 건 진실한 사랑에 대한 메시지다. 그것은 어쩌면 작가의 경험일 수도 있고, 관객의 경험일 수도 있을 것이다. 가식을 벗어던지고 진실한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 혹은 그렇게 하지 못해서 떠나보낸 사랑, 아니면 앞으로 다가올 사랑에 대한 맹세를 이 작품을 보면서 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스운 키싱구라미 커플을 보면서. 궁금하지 않은가. 당신이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영상자료실에서 볼 수 있다. 김일림/ 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 illim@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