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애니메이션 시대의 개척자
지난 10월 중순 외신들은 일제히 로버트 드 니로의 암 진단 소식을 타전했다. 아카데미상에 무려 6번이나 노미네이트되고 주연상 한번, 조연상 한번을 수상한 대배우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은 전세계인들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물론 암 이외에는 별다른 건강상의 문제가 없고 암도 수술을 통해 어느 정도 극복이 가능할 것이라고 대변인이 밝혔다고는 하지만, 그 뉴스를 접한 대부분의 영화팬들은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었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자신의 연기 폭을 넓혀가고 있는 대배우에게 암이란 부당해 보였기 때문이다. 혹시나 그가 건강상의 이유로 더이상 영화에 출연하지 못하게 될 경우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궁극적으로 영화 관객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자명했던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러한 안타까움을 드러낸 다수의 사람들과 달리 이제 로버트 드 니로도 은막 뒤로 사라져 자연인으로 돌아갈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한 이들도 상당수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사실 그런 의견은 이미 지난 6월 드 니로가 미국영화협회(AFI)의 평생공로상을 수상할 당시부터 일부에서 공개적으로 제기됐었다. 마틴 스코시즈,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메릴 스트립, 조디 포스터 등 동료, 후배들이 차례로 등장해 그가 출연했던 영화들의 명장면들을 되새기면서 그가 세운 영화적 업적을 찬양했던 그 자리가, 오히려 그의 용퇴를 주장하는 이들이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특히 칼럼니스트 개인들의 생각이 더 강하게 부각되게 마련인 미국의 지방언론들에서 그런 주장이 많이 나왔다. 드 니로에게 ‘철저한 자기 반성’을 요구하면서, 그렇지 못할 경우 ‘아름답게 용퇴해달라’는 식의 기사들이 여기저기에 실렸던 것이다.
드 니로의 ‘용퇴’가 거론되면서 그래야만 하는 이유로 가장 많이 언급되었던 영화가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도 개봉되었다. 바로 <록키와 불윙클>이다. <애널라이즈 댓>도 전편에 철저히 기댄 영화의 특성과 매너리즘에 빠진 듯한 드 니로의 코믹연기 때문에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록키와 불윙클>에서는 거의 최악의 출연작이라는 평가까지 받았던 것.
제이 워드의 또 다른 애니메이션 영화 <폭소 기마특공대>.
애니메이션 캐릭터 록키와 불윙클을 만들어낸 제작자 제리 워드.
로버트 드 니로도 <록키와 불윙클>을 살려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 영화에도 몇 가지 미덕이 있으니, 하나는 <코요테 어글리>에 여주인공으로 출연한 파이퍼 페라보가 본격적으로 조명받게 된 작품이라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잊혀져가던 TV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인 록키와 불윙클의 존재를 되살려냈다는 것이다. 1959년 <록키와 친구들>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미 <ABC>에 선보였던 이 두 애니메이션 캐릭터는, 띨띨한 스파이들인 보리스와 나타샤 캐릭터와 함께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2년여간 매주 토요일 저녁 6시30분에서 7시까지의 황금시간대를 장악하는 힘을 과시했다. 그리고 1961년부터는 로 둥지를 바꿔 <불윙클쇼>라는 제목으로 1964년까지 인기를 누렸다.
그렇게 냉전시대의 어린이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록키와 불윙클을 만들어낸 이는 제이 워드라는 애니메이션 제작자였다. 제이 워드는 애니메이션은 극장에서만 상영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었던 1950년 <십자군 토끼>라는 TV용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최초로 미국 전역에 방송하면서 TV애니메이션 시대를 이끌었다. 그뒤 <록키와 불윙클>을 통해 자신의 스튜디오를 확장한 그는, 캡틴 크런치라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콘프레이크 아침식사 제품의 광고를 제작해 애니메이션 광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Hoppity Hooper> <Uncle Waldo’s Cartoon Show> <조지 오브 정글> <폭소 기마특공대 쇼>(The Dudley Do-Right Show) 등의 애니메이션들을 통해 60년대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그런데 이번에 개봉된 <록키와 불윙클>말고도 그의 애니메이션들 중에서 두편이 더 영화화되었다. 97년 개봉된 <조지 오브 정글>이 하나고, 99년 개봉된 <폭소 기마특공대>(Dudley Do-Right)가 다른 하나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모두 브랜든 프레이저가 주인공을 맡아 미국에서는 흥행에 성공했지만, 미국 외의 시장에서는 실패했다는 것. 60년대 원작만화에 대한 정보가 없는 외국인들에겐 그저 황당한 슬랩스틱코미디로 보여질 수밖에 없는 한계가 분명했던 것이다. 이 두 영화말고도 제이 워드의 이름이 크레딧에 올라와 있는 영화가 하나 더 있는데, <록키와 불윙클>에서 스파이로 등장하는 보리스와 나타샤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삼은 92년작 <보리스와 나타샤>가 그 주인공이다. 물론 대중의 시선을 끌지 못했던 B급영화였지만, <록키와 불윙클> 팬들에게는 살아 움직이는 보리스와 나타샤를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는 평을 받았던 작품이다.
여하튼 그렇게 재미있는 뒷이야기들을 가지고 있는 원작 애니메이션의 힘을 살리지 못하고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코미디가 돼버렸다는 데 영화 <록키와 불윙클>에 대한 신랄한 평가는 충분히 인정할 만하다. 특히 로버트 드 니로가 <택시 드라이버> 속 자신의 연기를 흉내내기까지 했어야 했을까 하는 의구심은 지워버릴 수가 없다. 물론 드 니로 자신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이철민/ 인터넷 칼럼니스트 chulmin@hipop.com
▶ 영화 <록키와 불윙클> 공식 홈페이지 : http://www.rockyandbullwinkle.com
▶ TV시리즈 <록키와 불윙클> 팬페이지 : http://www.everwonder.com/david/bullwink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