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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키마영화제] 마이너리티 화이팅!
글·사진 이영진 2003-11-18

美동포 대학생 영화제, 스크린쿼터 포럼 열어

“아놀드 슈워제네거는 어딨어? 마중을 안 나왔단 말이지?” 겨울 우기(雨期)에 막 접어든 샌프란시스코. 공항을 빠져나오자마자 담배 한대를 물어든 이스트필름 명계남 대표가 오만 인상을 찌뿌린 캘리포니아 하늘에 대고 농담을 쏘아올린다. 그리고선 “이놈의 나라는 남의 것이라면 코딱지라도 뺏으려고 한다”면서 혀를 찬다. 샌프란시스코 현지시각으로 11월6일, 한국은 스크린쿼터 축소 움직임과 관련하여 비상시국에 들어선 상황. 명계남 대표를 비롯해 이춘연(영화인회의 이사장, 씨네2000 대표), 김혜준(영화진흥위원회 사무국장), 유지나(스크린쿼터문화연대 이사장, 동국대학교 교수), 김응수(<욕망> 감독), 윤재연 <여고괴담 세 번째 이야기: 여우계단> 감독) 등 평소 같았으면 국내에서 국회와 기자회견장을 오가며 바삐 대책을 마련하고 있었을 한국 영화인들이 돌연 외유를 떠난 이유는 뭘까. 답은 올해로 세돌을 맞는 키마영화제에서 마련한 스크린쿼터 관련 포럼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한국 유학생과 동포 2세들이 주축이 된 소규모 행사에 굳이 자리한 이유에 대한 궁금증은 동행한 지 이틀 만에 쉽게 풀렸다. 영화제가 준비한 짧지만 알찬 포럼을 대하면서 말이다. 여기, 간략하게나마 영화제의 정체성을 엿볼 수 있는 2개의 포럼을 소개한다.

포럼Ⅰ: 너희가 코메리칸을 알아?

트윈키(twinki). 한국말보다 영어가 편한 아이들을 부르는 속어라고 알려져 있다. 미국적 가치관이 몸에 밴 동포 2세들을 가리키는 이 말은 현지에서 좀더 포괄적으로 쓰인다. ‘바보, 얼간이’라는 경멸적인 뜻을 지닌 이 낙인은 황색 인종에게 붙여지며, 모국과 미국 어느 사회에도 온전히 편입되지 못하는 어정쩡한 경계인의 상태를 뜻한다.

11월7일 오후 2시.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 내 한 건물에서 열린 오픈토크는 차별을 먹고 살아온 한국계 트윈키들의 ‘커밍아웃’ 자리라 부름직했다. 대개 영화, 방송 등 미국 영상산업 부문에 종사하며, 커밍아웃의 징표로 이번 영화제에 자신의 작품들을 내놓기도 한 이들 한국계 미국인들은 여전히 몸으로 부대껴야 할 배타적인 환경 아래서 자신들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할리우드 진출이 궁극적인 목표인가라는 질문에는 다양한 견해들이 쏟아졌다. 7살 때 이민을 와 컴퓨터 엔지니어로 일하며 틈틈이 영화를 만들고 있는 김성훈씨가 “내 이상을 희생해서라도 할리우드에서 일하고 싶다”고 하자 워너브러더스에서 편집일을 하고 있는 사라 현은 “할리우드는 그들이 원하는 영화를 만들어줄 감독만 찾는다”며 “자신의 의도대로 찍는다 하더라도 스튜디오가 최종 편집권을 갖고 있는 이상 왜곡되게 마련”이라고 조언했다.

“미디어가 한국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 선입견이 작용하는 것을 코메리칸으로서 느끼는가”라는 질문에서 이들은 구체적인 경험까지 생생하게 곁들였다. 상담을 하다 접한 한국계 가정의 가정폭력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를 만든 김지수씨는 “이 영화를 만들고 나서 미국인들은 ‘한국 가정은 모두 저런가’라고 물었고, 한국인들은 ‘왜 이런 영화를 만들었냐’는 질책을 던졌다”며 이러한 상반된 반응 자체가 미디어의 왜곡을 보여준다고 했다.

<CBS>에서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는 수 권씨도 “동양 여성들은 모두 까만 단발머리에 눈은 찢어지고 입술이 빨간 줄 알고 있다”면서 “파생되는 결과가 좋든 나쁘든 간에 한국인의 실제를 알릴 수 있는 영상물이 더욱 많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라 현도 자신이 쓴 대본의 한 캐릭터를 두고 동료로부터 “이 역할은 흑인이 어울리겠어”라는 말을 들었다며, 이 사회는 인종에 따른 역할 분배가 여전하고, 철저하며 이는 가상의 영화 속에서도 작동한다고 지적했다.

2시간 가까이 진행된 포럼이 끝난 뒤에도 근처 스튜디오로 자리를 옮겨 대화는 이어졌다. 이번엔 한국 영화인들이 답할 차례였다. 주된 질문은 한국의 상황을 묻는 것이었다. 감독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여성감독이기 때문에 겪게 되는 고충은 없는지, 충무로 현장 경험이 없기 때문에 영화 일을 얻기가 힘들지는 않은지, 한국의 검열은 아직도 여전한지 등의 질의가 계속됐고, 한국 영화인들은 감독, 제작자, 정책연구가, 교수 등 다양한 이력에 걸맞은 조언과 답변을 제시했다.

♣허철(맨 오른쪽) 교수가 이탈리아 기자와 스크린쿼터에 관한 인터뷰를 하고 있는 모습(맨위). 키마영화제는 스크린쿼터 관련 포럼(가운데)외에도 미국에서 공부하는 유학생들의 고민에 한국 영화인들이 답하는 자리 또한 마련했다(아래).

포럼Ⅱ: 너희가 스크린쿼터를 알아?

영화제 폐막을 하루 앞둔 11월18일. 다운타운에서 멀지 않은 에바 브에나 예술센터에서는 스크린쿼터 관련 포럼이 열렸다. 샌프란시스코 현지 언론의 관심이 쏟아진데다 시민들의 관심까지 더해져 300석 규모의 좌석은 빠르게 채워졌다.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 영화학과 학과장인 스티븐 우즈라키와 같은 대학 영상학과 브렌트 말린 교수의 진행으로 이뤄진 이날 포럼은 “한국, 인도, 멕시코 등의 나라에서 자국영화가 50% 상영되는 것이 무엇이 이상한가”라는 유지나 교수의 질문으로 서막을 열었다.

유 교수는 이어 세계대전 이후 할리우드의 영향력은 날로 커져갔고, 이에 따라 각 나라의 영화산업은 붕괴의 국면을 맞았다면서 현재 미국의 스크린쿼터 축소 압력은 “할리우드 독점이 당연한 것”이라는 오만으로부터 비롯되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미국이 양국의 경제협상의 걸림돌로 스크린쿼터를 지목하는 현 상황은 “일부 거대 자본의 이익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일 뿐”이라면서 “한국을 비롯 캐나다, 프랑스 등을 중심으로 문화다양성 협약 발효를 위해 애쓰고 있다”고 말했다.

발제가 끝나고 참석자들 중에선 스크린쿼터를 축소하면 “미국과 투자협정을 체결할 수 있고, 보조금을 받을 수 있으니 오히려 득이 되는 것 아니냐”는 질문도 나왔다. 이에 대해 영진위 김혜준 사무국장은 보조금 지원은 대만의 사례에서도 보여지듯 별 효과가 없다고 잘라 말한 뒤, “한-미 무역역조가 2002년 기준으로 120억달러라며 이를 빌미로 미국은 미디어 분야의 장벽을 제거하라고 요구하고 있다”면서 “정작 한국의 영화시장 규모는 미국의 1.8%에 불과한 5억2천만달러 수준인데 스크린쿼터를 허문다고 해서 120억달러가 만회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김 사무국장은 미국의 스크린쿼터 축소 압력이 한국 영화산업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다는 점도 부각시켰다. 한 영화가 7∼8주씩 상영되는 미국과 달리 한국은 편당 상영기간이 1∼2주에 불과한데도 할리우드 직배영화들은 이러한 유통환경을 염두에 두지 않고 과다 마케팅 비용을 책정하기 때문에 수익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이를 한국의 스크린쿼터 때문이라는 주장은 적절치 못하다고 반박했다. 이춘연 이사장은 양국의 영화산업 시장 규모에 엄청난 차이가 있고, 이 때문에 스크린쿼터제가 필요하다는 논리를 재미난 비유로 설명했다. “실력이 엇비슷한 경우가 아니면 골프를 칠 때도 핸디를 주고, 탁구를 칠 때도 몇점 쥐어주는 게 상식”이며 “그렇다고 해서 스크린쿼터 때문에 할리우드영화 못 걸겠다는 극장은 한 군데도 없다”고 말했다. 명계남 대표도 “스크린쿼터는 관객의 선택을 방해하기보다 할리우드의 독과점을 제한하고 다양성을 보존하기 위한 장치”라고 거들었다.

이들 한국 영화인들은 현재 여러 나라의 마이너영화들에 대한 상영 기회 및 기간 보장 등에 대한 논의가 한국에서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면서 외려 포럼에 참석한 이들에게 다양한 영화를 맛볼 수 있는 운동을 전개하라고 제안했다. 스크린쿼터가 한국 영화인들의 특정 이기주의에 근거한 운동이 아니듯, 이곳에서도 문화향유권을 위한 영화운동이 필요하다는 것. 일례로 일정 외국영화를 수입토록 하는 쿼터제 도입 등을 제시했다. 이에 관객 중 여럿은 “최근 <매트릭스>가 미국 전역의 극장을 싹쓸이하는 광경에 질렸다”면서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커뮤니티를 만들어보겠다”고 약속했다.

폐막작인 <오아시스>를 끝으로 11월18일 저녁 6일 동안의 행사를 모두 마친 이번 키마영화제는 포럼의 주제와 진행에서도 엿보이듯 마이너리티를 위한 연대행사가 무엇보다 돋보였다. 불안정한 예산과 미비한 홍보 때문에 많은 상영작과 화려한 게스트와 북적거리는 관객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영화제였음에도 불구하고 방문자들의 뇌리에 “마이너리티와 함께 호흡하는 영화제”로서의 위상을 뚜렷이 새겨놨다.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 영상학과 허철 교수할리우드영화도 상영 제한?

허철(37) 교수는 키마영화제의 산파다.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 영상학과 교수로 부임했던 4년 전부터 이 행사를 도맡아 꾸려왔다. 부족함 없어 뵈는 그가, 굳이 지인들과 동포들에게 수백달러씩 꿔가면서까지 이 영화제를 끈질기게 치르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 “영화제를 할 때마다 백인 아니면 흑인이라는 이분법적 사회에서 황색 이방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자문하게 된다.” 그의 답변을 좀더 들어보자.

행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2000년 가을학기에 이곳에 왔는데, 도서관 앞에서 한국 학생 몇명을 우연히 만났다. 주로 뭐 하면서 대학생활을 보내냐고 말을 건넸더니, 술 마시고 나이트클럽에 가서 논다고 그러더라. 그래서 보람있는 일을 하면서 대학 시절 추억거리를 만들어보자고 꾀었다. 적극적인 학생들이어서 금세 반응을 보였다. 두달 만에 근처 버클리대, 산호세 주립대, 아트 칼리지 등의 학생들까지 가세했고, 연합 학생동아리 키마를 만들어 2001년 2월에 첫 번째 영화제를 열었다.

유학생활 하면서 피부로 느꼈던 본인의 문제의식도 작동했을 텐데.

미국사회는 다인종 사회다. 구성원 대부분이 이민자다. 그런데도 앵글로 색슨이 사회 각 분야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게 현실이다. 유색인종의 목소리는 영화 및 미디어 전반에서 부재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인 아니면 흑인밖에 없는 듯한 사회에서 아시안은 중간에 붕 뜬 존재라고나 할까. 우리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누고 싶은 장으로 영화제가 가장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동안 행사를 치르면서 힘들었던 때는.

1회 영화제를 마친 다음 거의 모든 학생 멤버들이 탈퇴했다. 불협화음도 많았고. 이 행사를 왜 하는지 서로 공유하지 못한 결과였다. 그때는 나도 못하겠다 싶어 지도교수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했다. 인위적으로 영화제를 끌고 가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고 봤으니까. 우리집 앞에서 소주병 들고 새벽 2시까지 시위했던 몇몇 학생들 아니었으면 1회 행사로 끝났을지도 모르겠다. (웃음)

어떻게 극복했나.

남은 학생들하고 원칙을 정했다. 영화제는 안 해도 된다. 순수하게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끼리 모여서 우리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그때부터 버클리와 샌프란시스코 지부로 나누어 학생들과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영화 서클인데 문화이론 공부는 왜 하냐고 묻던 학생들이 6개월이 지나니 새 후배들에게 그것이 왜 필요한지 설명해주더라. 그러면서 각 학생들이 갖고 있는 전문 분야를 서로 공유할 수 있도록 프로덕션 워크숍 등의 행사를 겸했다.

올해 상영작 선정 기준을 알려달라. 요즘 코메리칸영화들의 경향에 대해서도.

한국인으로서 경험과 고민이 주체적으로 그려졌는지를 봤다. 단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영화들은 제외했다. 전보다 장르가 다양해졌다는 점, 주제를 다루는 데 있어 구체적인 접근이 돋보인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영화를 상영하는 행사인데다 이번에는 포럼으로 스크린쿼터에 관한 주제를 택했으니 미국쪽 스폰서를 구하기 힘들었겠다.

어려움이 없지 않았다. (웃음) 반면, 한국영화를 보고서 자신이 지금껏 할리우드영화에 중독됐었음을 깨닫게 됐다며 고맙다고 말해주는 미국인도 많다. 드문드문 있는 아트하우스에나 가야 외국영화나 인디펜던트영화를 볼 수 있으니 그럴 수밖에. 우리 영화제가 문화다양성을 위한 영상운동의 축이 됐으면 한다. 그래서 연간 일정일수 이상은 할리우드영화를 상영할 수 없도록 만들 계획이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