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날씨가 화창한 날. 대학로의 한 극장 앞에 한 무리의 외국 여자들이 내 앞에서 표를 사고 있었다. 매표소 앞에서 가만히 들어보니 자기들끼리 독일 말을 하는 것 같다. 우연치 않게도 그들과 나란히 앉아 <굿바이 레닌>을 보게 되었다. 캭…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입은 웃는데 눈엔 눈물이 나는 시간을 다 보내니 극장 안에 불이 켜졌는데 내 얼굴은 시뻘개져서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눈물과 콧물과 웃음과 부끄럼이 범벅된 얼굴을 수습하려고 화장실 거울을 보는데 옆에 그 독일 여자들이 웃으며 나에게 휴지를 건네준다. 가만히 보니 그네들 눈두덩이도 빨갛다.
아주 가끔씩 극장에서 동시대 감독들의 독일영화가 개봉될 때면 우리가 독일영화는 어쩐지 관념적이고 아주 지루하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던 게 고루한 편견인가 싶을 정도로 재미있는 영화들을 만날 때가 꽤 있다. 94년에 개봉됐던 브리짓 존스의 독일식 판타지 <파니 핑크>, 붉은 머리 내달리던 99년의 <롤라런>, 그리고 2003년 지금 개봉해서 상영되고 있는 <굿바이 레닌>이 바로 우리의 독일영화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린 대표적인 재미있는 영화다. 위 영화들 모두 아쉽게도 개봉한 극장이 얼마 안 되는 비운의 영화라서 미리 말하지만 <굿바이 레닌>이라도 빨리 서둘러 극장에서 꼭 보기 부탁한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팬도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팬도 모두 좋아할 영화가 바로 <굿바이 레닌>이다.
유독 난 성장기 이야기를 좋아한다. 어릴 적 놀이가 현실의 공포가 돼 나타난 이라든지, 감정이입 절대 하지 않고 쌍둥이 형제가 써내려간 비밀일기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속의 성장 이야기라든지, 그리고 <굿바이 레닌>에서의 알렉스까지.
알렉스는 꽤나 집요하다. 엄마를 위해 하는 자신의 거짓말을 실현하기 위해서 벌이는 해프닝이 아주 집요하다 못해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이제는 없어진 상표인 동독제 피클병을 주워와 소독해서 엄마에게 밥상을 차려줄 때까지만 해도 그려려니 했다. 그런데 친구 드니스- 이 친구 괴짜로, 스탠리 큐브릭 광팬인 모양이다. 결혼식 비디오 찍으며 훗날 감독을 꿈꾸는데 부케가 날라오는 장면을 알렉스에게 보여주며 <스페이스 오디세이> 같지 않냐며 자꾸 물어본다. 푸하하핫- 와 둘이서 엄마를 위해 가짜 뉴스까지 만든다. 그리고 더 나아가 대통령까지 바꾼다.
꿈이 거짓말이 되고 거짓말이 꿈이 된 환상적인 장면이다. 자신이 만든 거짓말을 엄마한테 보여주는 것이 사실 거짓말이 아니라 알렉스의 꿈인지 그는 엄마가 보는지 신경도 안 쓰고 자신이 만든 화면에 빠져든다. 그런 알렉스의 뒷모습과 그것을 거짓이라고 알면서 속아주며 바라보는 엄마의 눈길. 이 장면을 보고 있는데 참을 수 없었다. 긴 한숨과 눈물이 나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난 스포일러가 되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어야지. 아이구 근질근질. 엉 뭐라고? 다 말했다고? 아니다. 이 장면은 극히 일부일 뿐이다. 현실에서 너무나 영화 같은 이미지들이 이 영화에서 너무나 현실적으로 잘 차용된다. 레닌 동상이 헬리콥터에 의해 철거되는 이미지는 정말 현실에서 봤을 때 너무 드라마틱하지 않던가. 그 드라마틱한 현실이 드라마에서 현실적으로 그려지니 손바닥을 탁 칠 수밖에.
이런 세상의 아이러니, 그리고 거짓말을 알아차릴 때의 아이러니. 꿈이 너무나 쉽게 실현될 때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일찌감치 깨달은 나의 동료의 일화 한 토막 “어렸을 적 너무나 갖고 싶은 물건이 있었는데 그것을 크리스마스 전에 모든 사람들한테 알렸다. 가족 모두와 친구들이 알고 있는데 정말로 크리스마스 때 그 선물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난 산타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아이러니를 너무 빨리 알아버린 천재소년! 이 영화를 먼저 보고 달려와 흥분하며 보라고 난리였다. 헤헤 하지만 난 그 소년도 못 본 멋진 것을 마지막에 봤다. 영화 타이틀이 올라갈 때 서비스 삽화가 나온다. 쿠하하. 모두들 빨리 극장으로 달려가시옷. 가자 대학로로!! 레닌과 함께.김정영/ 영화제작소 청년 회원·프로듀서 sicksadworld@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