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는 아이들과 친하다. 상상력이 고갈되고 사고의 체계가 굳어버린 어른들에게 만화는 읽히지 않는 난독의 텍스트이지만, 어린이들에게는 어떤 만화라도(설령 그 만화의 수준이 조악하다 해도) 놀라운 상상력의 바다다. 어린이들의 상상력, 특히 이미지 언어에 대한 열려 있는 독해력은 만화의 칸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유영한다. 자유롭게 열려 있는 그래픽, 특정한 이야기를 분할된 화면에 나누는 연출, 말풍선이라는 매우 독특한 대화표현방법, 효과선이나 효과음처럼 기호의 힘을 활용한 표현방식은 어린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왼쪽부터) <석기시대 천재소년 우가> 와 <곰>
레이먼드 브릭스의 <석기시대 천재소년 우가>와 <곰>은 오랜만에 만난 어린이 만화다. <곰>은 곰돌이와 함께 잠이 든 틸리에게 거대한 곰이 찾아오는 이야기다.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 효율적으로 나뉜 칸 속의 세밀한 파스텔 작화는 매우 인상적이다. 거대한 곰이 창문으로 들어오고, 그 곰을 덤덤하게 맞이하는 틸리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어른들에게 있어 ‘곰’은 상상이지만, 틸리에게 ‘곰’은 현실이다. <석기시대 천재소년 우가>는 석기시대를 배경으로 돌바지 대신 부드러운 바지를 찾으려 하는 소년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이 두 작품의 원작자인 레이먼드 브릭스는 애니메이션 <스노우맨> <산타할아버지>의 원작자로 유명하며, 그의 작품은 이 두편 이외에도 여러 편이 출판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레이먼드 브릭스와 그의 작품이 만화가와 만화로 소개되지 않고 그림책 작가와 그림책으로 소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2003년에 새롭게 출간된 <석기시대 천재소년 우가>에 수록된 작가 설명에는 ‘어렸을 때 꿈이 바로 만화가였’지만 일러스트레이션에 관심을 갖게 되며 그림책 작가가 되었다고 쓰여 있다. 당혹스럽게도, 명백히 만화인 <석기 시대 천재 소년 우가>의 작가설명에 ‘이 사람이 어린 시절에 만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제대로 미술을 배우고 나서는 일러스트레이션 작가가 되어 그림책을 그리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도 만화에 대한 편견은 크게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아직도’ 어린이들에게 ‘만화’는 피해야 할 대상이라 멀쩡한 만화가 ‘그림책’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레이먼드 브릭스의 작품들은 대부분 만화다. ‘만화의 형식’을 빌렸거나, 아니면 ‘만화의 표현’을 빌린 것이 아니라 그대로 만화다. 레이먼드 브릭스의 대표작인 <스노우맨>과 <바람이 불 때에>, 그리고 <곰>도 역시 모두 만화다. 부드러운 파스텔이나 수채를 활용한 친근한 그래픽은 일러스트레이션이 아니라 칸 속에 존재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만화다. 하지만 역시 이들 작품도 모두 ‘그림책’으로 출판되고 팔리고 있다.
내가 이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아침 TV 홈쇼핑에서 레이먼드 브릭스의 작품이 포함된 56권까지 그림책 시리즈를 판매하는 방송을 보면서다. 2003년 한국에서 그림책은 이제 출판시장의 대안으로 자리잡으며 홈쇼핑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그림책’이란 이름으로 자기의 정체성을 숨긴 ‘만화’들이 숨어 있었다. 어디 이뿐인가. 실질적으로 많은 그림책들은 이전의 설명적 일러스트레이션을 극복하고 일러스트레이션이 이야기의 진행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다양한 기호를 활용하고, 칸(보이는 칸은 물론 보이지 않는 프레임까지)을 활용하는 표현의 방법으로 만화를 대대적으로 도입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오랜 세월 만화는 아이들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만화는 매체를 넘어 표현의 방법으로도 아이들에게 다양하게 소비되어졌다. 하지만 역으로 또 오랜 세월 만화는 이 세계의 시민권을 획득하지 못한 채 국외자의 처지로 존재해야만 했다. 만화에 시민권을 되찾아주는 일은 누구의 몫인가. 그림책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자신의 존재증명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만화에 ‘만화’라는 제 이름을 붙여주어야 할 사명은 ‘만화’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다. 90년대 이후 일본시장의 모범을 따라 청소년용 만화만을 죽어라 찍어대던 출판사에, 일본 만화잡지의 신작연재 소식을 발빠르게 자기 홈페이지에 올리는 일부의 만화가(혹은 스토리작가)들에게, 대형만화출판사의 잡지만화만이 한국 만화시장을 끌어간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에게 레이먼드 브릭스의 ‘만화’를 권한다. 한국만화시장을 구원할 대안은 이런 ‘다양함’이고, 한국 만화시장의 문제는 이런 ‘다양한 만화들’이 만화로 인정받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데서 시작된다. 박인하/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