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무소 직원 영주(이나영)는 영어학원에서 만난 문수(장혁)에게 첫눈에 반하지만 문수는 영어학원 강사 캐서린에게 집적대느라 영주의 매력을 보지 못한다. 캐서린을 질투하던 영주는 어느 날 캐서린의 집에 찾아가 캐서린이 문수를 마음에 두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지만 문수는 여전히 영주에게 사심을 품지 않는다. 문수를 꼬시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하던 영주는 문수가 흘린 지갑에서 여자의 사진을 발견한다. 영주는 이 여자가 문수의 애인일 거라 오해하지만 그녀는 어린 시절 헤어진 문수의 여동생. 사실 문수는 미국의 한 집안에 입양됐던 여동생이 귀국한다는 소식을 듣고 영어공부를 시작했던 것이다. 영주는 문수의 여동생을 문수의 애인으로 착각하고 둘의 만남에 방해공작을 펼치게 된다.
■ Review<영어완전정복>의 원형은 신데렐라 이야기다. 계모와 배다른 언니들에게 구박받으며 누추한 생활을 면치 못하던 신데렐라가 왕자님을 만나 행복하게 살았다는 그 오래된 동화를 현대로 옮겨오면서 <영어완전정복>은 몇 가지 변형을 가한다. 신데렐라와 왕자는 동사무소 직원 영주와 신발가게 종업원 문수로 바뀌고 계모와 배다른 언니는 금발의 영어학원 강사와 미국에 입양됐다 돌아온 문수의 여동생이 된다. 선과 악의 대립전선이 영어를 못하는 남녀와 영어에 능통한 두 여자 사이에 그어지면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여기서 영어는 신데렐라와 왕자가 넘어야 할 장애물인 두 여자를 일컫는 말일 것이다.
흥미로운 건 현대의 신데렐라와 왕자가 동화처럼 완벽한 남녀가 아니라는 점이다. <영어완전정복>의 신데렐라 영주는 두꺼운 안경 아래 예측불허의 상상력을 숨기고 있는 여자로 등장한다. 어디서든 튀지 않고 숨죽이며 살아온 영주가 영어학원에서 듣는 첫 번째 코멘트는 “쉬 이즈 노멀”이다. 신데렐라에게 친어머니가 없다는 게 천형이었다면 평범함은 영주의 천형. 영주가 평범함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택하는 방법은 멋진 남자를 만나는 것이다. 신데렐라의 잃어버린 구두를 찾아주는 인물로 재벌 2세나 귀족적 풍모를 풍기는 남자가 등장할 법한데 이 지점에서 영화는 다시 상상력을 발휘한다. 영주의 발 사이즈에 관심을 보이는 남자 문수가 실은 백화점 신발가게 종업원이었으니 그녀의 과대망상이 상당히 심각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영주의 과대망상은 <영어완전정복>이 이야기를 전개하는 동력이다. 영주는 누구든 문수가 눈길을 주는 여자를 경쟁상대 또는 계모와 배다른 누이로 착각한다. 처음엔 영어학원 강사 캐서린, 나중엔 문수의 여동생이 눈에 거슬리는 존재가 된다. <영어완전정복>은 영주의 오해와 착각을 좇아가는 코미디이다.
모든 소동은 <영어완전정복>이 영주의 혼란을 방치하는 데서 발생한다. 문수를 왕자님으로 여기는 영주, 정말 그녀는 문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사랑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인가? 영주의 진심을 잘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영화는 어떻게든 영주와 문수를 맺어줘야 한다는 강박에 매달린다. 로맨틱코미디에 어울리는 결말을 위해 다음 수순은 문수의 마음을 돌리는 일이다. 물론 이건 쉬운 일이 아니다. 처음에 영주를 거들떠보지도 않던 문수가 왜 영주를 사랑하게 됐는지 영화는 쉽게 설득하지 못한다. 대신 영화는 사랑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영어학원 강사 캐서린이 피자집 배달원에게 반하는 장면은 그런 점에서 <영어완전정복>이 내놓는 변명이다. 가난하고 별볼일 없는 남녀가 스스로를 신데렐라와 왕자로 착각하게 만드는 마술, ‘노멀’이 ‘스페셜’로 변하는 기이한 조화, 그게 사랑이고 여기엔 어떤 설명도 필요없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영어완전정복>은 함정에 빠진다. 로맨틱코미디인 이상 사랑을 그려야 하는데 영화는 정작 사랑의 실체에 대해 입을 다문다. 평범한 남녀를 왕자와 공주로 보이게 만든 그 신비함의 정체를 풀어야 할 영화가 “참, 별난 일이지, 재미있지 않니?” 하며 감탄사만 내뱉는 격이다.
김성수 감독은 영주라는 캐릭터에 이끌려 이 영화를 연출하게 됐다고 말했는데 실제로 <영어완전정복>의 이나영에게는 <엽기적인 그녀>의 전지현 못지않은 매력이 있다. 엉뚱하고 황당한 영주의 모습은 분명 귀엽고 예쁘다. 평범함이 콤플렉스인 여자로 보이지 않는다는 문제만 없다면 충분히 즐겁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묘한 것은 <영어완전정복>이 알게 모르게 <엽기적인 그녀>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점이다. <엽기적인 그녀>의 차태현이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로 캐릭터를 이어간 것처럼 <영어완전정복>의 영주는 <엽기적인 그녀>의 전지현을 변형시킨 인물로 보인다. 실제로 <엽기적인 그녀>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 <영어완전정복>, 세편의 투자사는 동일하다.
<영어완전정복>은 김성수 영화의 개성이 두드러지는 영화가 아니다. <런어웨이>에서 <무사>까지 김성수 영화는 다른 영화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시각적 쾌감을 안겨주곤 했다. 그는 이번 영화에서 게임, 애니메이션, 만화 등 다양한 요소를 활용한 유머를 보여주지만 김성수 특유의 스타일을 보긴 어렵다. 다양한 기법을 활용한 <영어완전정복>의 코미디는 때로 폭소를 만들지만 더러 쓴웃음이 나온다. 감독의 영화를 기대한 관객이라면 그 씁쓸함에 마음이 무거워질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