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모습 처음은 아니다. 한 젊은이가 인생의 문 앞에 서 있다. 무지갯빛 희망과 잿빛 불안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때 누군가 나타나 그를 유혹한다. 처음에는 거부하려 하였으나 어쩔 수 없는 힘에 끌려들어간다. 그리고는 돌아오지 못한다. 당신은 괴테의 <파우스트>를 떠올리고 있는가? 나는 우스타 교스케의 <멋지다 마사루>를 떠올린다. 이제 떠올릴 게 하나 더 생겨났다. 우스타의 신작 <삐리리∼ 불어봐 재규어>(대원씨아이 펴냄)다.
기타리스트를 꿈꾸는 고교 3학년 키요히코는 오디션을 볼 음반회사 앞에서 신비한 소년 재규어를 만난다. 뾰족머리에 단정한 하얀 옷, 목에는 긴 머플러…. 조금 이상하기는 하지만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와 닮은 모습이다. 이상한 주법의 피리소리로 키요히코의 혼을 뺀 재규어는 그에게 피리를 불어보라고 권한다. 키요히코는 거절한다. 재규어는 운다. 절규한다. “그럼 안 불면 되잖아. 니 맘대로 해.” 키요히코는 저도 모르게 사과한다. 하지만 미안하단 말로 끝나는 만화는 세상에 없다. 이제 그의 곁엔 언제나 재규어가 있고, 정신을 차린 순간 그와 동거하고 있고, 다시 눈을 번쩍 뜬 순간 그의 별난 음악 세계에 취해 있다. 이름도 피요히코가 되어 있다. 이제부터 나도 피요히코라고 부르겠다.
<멋지다 마사루>를 은근슬쩍 돌려놓았지만 별로 다를 것도 없는 이야기다. 재규어는 진지하게 집안일을 제비뽑기로 나누자고 하지만, 비밀 박스 안에 넣은 피요히코의 손은 밥알로 범벅이 되어 수십개의 제비를 한꺼번에 뽑고 만다. 두 사람이 동거하는 기숙사 천장에선 최신 유행 힙합 흉내를 내지만 본성은 구닥다리 닌자인 통칭 ‘해머’가 산다. 식당에서 재규어를 만난 강철 머리 빌리는 빌리젠트(빌리+리젠트) 공격을 가하지만, 재규어는 피리로 머리를 불어 폭신폭신 내추럴 스타일로 만들어버린다. 피요히코는 재규어의 괴팍한 세계관에 물들어가지만, 이 세계에는 이미 ‘으뜸 재규어’에 ‘버금은 가는’ 괴상한 생명체들이 암약하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재규어를 만나고 난 마사루 팬들의 반응은 반반으로 생각된다. 한쪽은 “이게 뭐야? 마사루에서 재규어로 얼굴만 달라졌잖아. 게다가 약간 김이 빠진 듯”. 다른 쪽은 “그래도 다시 그려주는 게 어디야? ‘세이소 문’과 벌이는 코스프레 대결은 최고의 <유리가면> 패러디 아냐?” 솔직히 비평적으로는 “그림이 좀 나아졌지만, 사실상 <멋지다 마사루>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았다”며 질타를 당해도 싸다. 하지만 이런 비평을 들은 우스타는 자신의 마음을 시로 표현하고 있다. “소재 고갈 소재 고갈/ 지들 하고 싶은 대로 지껄이지만/ 소재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구!/ 작가가 소비하고 있는 것은 수명뿐이란 말이다. 임마!”
그래 어쩌겠나. 애초에 무의미라서 훌륭했는데 거기에 더 무의미가 되길 바라겠나? <이나중 탁구부>에서 <크레이지 군단>으로, 다시 <두더지>로 자꾸 전진해간 후루야 미노루를 생각해보자. 청춘의 무책임 광란에서 출발해 헤어날 수 없는 자포자기의 음습한 철학으로 발전했지만, 그래도 가끔은 이나중의 시절이 그립지 않나? 후루야는 잘난 녀석이 되어버렸지만, 우스타 정도는 옛날 그대로 남아도 상관없지 않을까? 고등학교 동창회에 갔다. 옛날에 장난만 치던 바보가 촉망받는 예술가가 되어 돌아온 데 박수를 보내는 것도 좋지만, 아직도 그때처럼 유치한 미치광이 짓을 하고 있는 녀석을 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 고기 한점씩 이마에 붙이고 밥그릇을 높이 들며 외쳐보자. “마이 네임 이즈 쌀주인, 렛츠 아베크 플리즈!”
반복 학습으로 만나는 마사루-재규어의 처세술은 아직도 유효하다. 오히려 더 절절하다. 하나, 먼저 동정심으로 상대를 흔들어라. “아아 그렇지. 기타는 피리보다 허접한 거군.” “아니오.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둘, 지나친 자신감으로 상대를 무력화시켜라. “자네 지금이 기회야. 몰라? 그런 걸 결단할 수 있는가 없는가로 출세길이 결정되지 않는가?” 셋, 자신에게 불리할 땐 현실 도피. “나와라, 러키 카드. 뭐, 쓰레기 치우기? (창 밖을 보며) 요들레이히∼.” 넷, 도망갈 수 없을 땐 즐겨라. “오늘은 모두가 무척 충실하고 쓸데없는 시간을 보냈다.” 다섯, 조금 더 나가면 자아도취에 의한 이론화와 체계화. “단음 악기인 피리의 한계를 넘은 코드. C세븐즈, D세븐 서스펜디드 포스, 여우소리. 파동권, 최고급 쇠고기….” 우리는 또 이렇게 어린 왕자의 행색을 한 고등 사기꾼에게 걸려들었다. 그런데 알고 있나? 오리지널 어린 왕자도 다를 게 없다는 걸. 왕자는 “‘길들인다’는 게 무슨 뜻이야?”라고 자꾸 여우에게 물어보더니 “제발… 나를 길들여다오!”라는 말을 받아내잖아. 이명석/ 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 www.sugarspr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