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굿바이 레닌>에서 키치의 뒷모습을 보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생각하면 잘생긴 의사 토마스나 사비나, 테레사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이 똥과 스탈린의 아들 이야기다. 1980년에야 언론에 공개된 바에 의하면 스탈린의 아들은 똥 때문에 죽었다고 한다. 그는 2차대전이 터진 직후 포로로 체포돼 영국군 장교들과 함께 감금됐는데 스탈린 아들의 배변습관이 문제였다. 똥을 눌 때마다 화장실을 심하게 더럽혀서 이 때문에 동료 포로들에게 갖은 모욕과 주먹질까지 당했다고 한다. 동료들은 수용소장에게 해결을 요구했지만 독일군 소장은 ‘똥’이라는 발음조차 내기를 거부했다(제국을 향한 신성한 열정 앞에서 웬 똥타령!). 그는 이 굴욕감을 견디지 못해서 전기가 흐르는 수용소 철조망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꽥. 신의 아들이라 불러 마땅했을, 두 어깨에 광채를 매달고 평생 살았을 스탈린의 아들이 똥 때문에 죽은 것이다. 쿤데라는 스탈린 아들의 이 우스꽝스러운 죽음(스탈린 아들에게는 미안하지만)을 어떤 구호를 위해 내던진 죽음보다 형이상학적인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쿤데라는 똥을 부정하는 세계, 모두가 거기에 똥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세계의 미학을 ‘키치’(저속)라는 말로 비판한다. 어떤 하나의 이상,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붓삼아 똥과 쓰레기, 범죄와 증오 등 온갖 더러운 것들을 쓱쓱 지우고 거기에 사랑과 우정, 희생과 박애 등 숭고한 것들만 그려넣다보면 그것이 바로 키치의 장대한 스펙터클이 된다는 것이다. 사랑과 믿음, 미래에 대한 밝은 희망의 구호만이 넘쳐흐르던 현실 사회주의 세계의 노동절 축제, 새벽종이 울리고 새 아침이 밝으면 ‘잘살아보세’ 외치며 모두가 집을 뛰쳐나가는 우리나라의 새마을운동 따위가 모두 쿤데라가 말하는 키치에 속하는 풍경들일 것이다.
<굿바이 레닌>은 쿤데라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이야기한 ‘키치’에 대하여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한다. 동독의 붕괴 직전 쓰러졌다가 통독이 된 뒤 깨어난 열혈 사회주의자 어머니를 놀라게 하지 않기 위해 눈물겹게 효도하는 알렉스를 보면서 중반부까지 나는 이 영화가 효심 지극한 청년의 아름다운 가족사랑이라는 ‘키치’적인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다. 물론 알렉스가 어머니를 위해 옛날 모습 그대로 재현해놓는 방이나 어머니를 위해 준비하는 밥상이야말로 진정한 ‘키치’의 표상일 것이다. 알렉스는 이제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그리고 실은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아름다운 비전을 담은 옛 동독 물건들의 상표를 그러모은다. 어머니의 생일날에는 사람들을 불러모아 (그 역시 한번도 실존하지 않았던) 옛 영화의 드라마를 복원한다. 코카콜라의 거대 입간판을 보고 충격받은 엄마를 위해 코카콜라가 실은 50년대 동독에서 개발한 제품이었다는 엉터리 뉴스를 만들어 텔레비전에 틀어놓는 장면은 그가 만들어내는 ‘키치’의 정점이다.
그러나 영화는 후반부로 가면서 흥미로운 유턴을 한다. 거대한 키치 그림 안에 들어가 있던 인물- 알렉스와 엄마- 이 그림 밖으로 나와 그 그림을 들여다보는 형국이다. 알렉스는 누나의 지탄을 받아가며 벌였던 쇼가 실은 엄마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퍼포먼스였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오스탤지어’라는 옛 동독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그럴 리가 있겠나, 젊은 놈이) 어떤 꿈, 모두가 열망했으나 결코 이뤄지지 않았던 꿈에 대한 착잡한 되새김이다. 그의 엄마 크리스티아네는 한술 더 뜬다. 열혈 사회주의자인 줄만 알았던 크리스티아네가 다시 쓰러지기 직전 털어놓는 폭탄 고백은 알렉스와 누이의 머릿속에 각인된 지난 시대의 표상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놓는다. 남편이 떠난 뒤, 어쩌면 그 전부터 그는 자신의 삶의 조건을 회의했고, 그만큼 더 치열하게 그 삶의 조건에 자신을 겹쳐놓았던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크리스티아네의 오스탤지어는 처절한 비통과 슬픔으로 그 정체를 드러낸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에게 왜 거짓되게 살았는가, 왜 시스템에서 뛰쳐나오지 않았는가를 비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구분한다면 세상은 주어진 대로의 존재에 회의하는 사람들과 유보없이 그 존재를 수락하는 사람들로 나뉘어지겠지만 평범한 대다수 사람들은 그 대치점의 중간 어딘가에서 조금씩 치우쳐 서성거리며 사는 것이 아닐까. <굿바이 레닌>은 이것이 키치인 줄 알지만 그림 밖으로 나오지 못했던 사람들, 반항의 액션을 보여줄 용기도 없지만, 그렇다고 행복한 표정연기도 어색했던 사람들에게 바치는 쓸쓸한 송가처럼 보인다. 김은형/ <한겨레> 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