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영화를 봤을 때 나는 너무 어린애였다.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극장에 처음 갔을 때 난생처음 들어가보는 거대하고 깜깜한 공간과 난생처음 들어보는 커다란 굉음들과 고개가 뒤로 젖혀져 나자빠질 것만 같은 거대한 화면에 얼이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때 상영 중인 영화는 한국전을 다룬 국산 전쟁영화였는데 그 엄청난 스케일의 폭음과 비명과 다급한 외침들과 팔다리가 지뢰에 날아가는 까무러칠 장면들을 보다가 결국, 논두렁에서 개구리나 잡고 놀던 게 전부였던 나는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던 기억이 있다. 난처해지신 어머니는 결국 영화를 다 못 보시고 경기를 일으키듯 울어젖히는 나를 데리고 극장을 나와야 했다. 그뒤로도 오랫동안, 나는 남모르게 그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종종 전쟁꿈에 시달리곤 했다. 세상에서 처음 만나는 영화란 정말 너무 생생한 경험이다.
그저 때리고 치고 박고 던지고 뛰다가 놀다 지쳐 해지면 잠드는 어린애에서 보고 듣고 읽기에 집중할 줄 알게 되던 무렵 주말의 명화를 보기 시작한 것은 영화와의 두 번째 만남이다.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고 감동적이고 놀라운 일이 주말마다, 우리집에 있는 텔레비전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러던 어느 날, 젤소미나와 잠파노가 우연한 방문객처럼 주말의 명화로 찾아왔다. 어? 뭐지? 이 기분은? 재미있다고 호들갑을 떨 수도 없고, 슬프다고 엉엉 울 수도 없고, 가슴속에서는 뭔가 울컥하고 콧날은 시큰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입술은 미소를 띠고 있는 듯도 했다. 바야흐로 생각보다 말이 더 많은 나이에서 말보다 생각이 더 많아지는, 사춘기로 접어드는 작은 고갯마루에서 바로 젤소미나와 잠파노의 그 엉터리 차력쇼를 만난 것이다. 그뒤로도 오랫동안 며칠인지, 몇년인지 모를 시간 동안 젤소미나의 콧노래와 잠파노의 트럼펫 소리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나는 말수가 줄고 대신 그림밖에 모르는 신경질적인 소년으로 자라고 있었다. 그 소년이 매일 코피로 그림을 그렸다고 해도 될 정도로 어렵게 미술대학에 들어갔을 때, 거기에는 예술은 몽땅 유보되고 ‘민족미대’라는 깃발만이 큰소리로 펄럭이고 있었다. ‘오∼ 어머니 당신의 아들, 자랑스런 민주의 투사’를 양심껏(!) 부르던 시절. 한편으로는 레이저디스크라는 것이 지구를 침공하는 UFO처럼 학교 앞 카페마다 쳐들어와서는 대형 빔프로젝트로 그 찬란한 광채를 아낌없이 쏘아댔다. 그 UFO는 ‘핑크플로이드의 <더 월>’을 내게 쏘아주었다. 나는 턱이 빠졌고, 정신을 차렸고, 눈이 떠졌다. <더 월>의 빛은 내가 처음 올려다본 푸르고 동그란 하늘이었다. 우물 속에서 바라본 동그란 하늘.
내가 정의하기로는, ‘예술이란 생각하는 동기를 제공하는 것’이다. 물론 그 밖에도 많은 존재가치와 효용가치와 정의와 판단기준과 다양한 기능이 있겠지만, ‘생각하는 동기’를 제공한다는 점이 예술의 절대적 가치라고 믿고 있다. 영화는 예술이다. 오락일 수도 있고 비즈니스일 수도 있고 상품이기도 하지만 한편 짧은 역사치고는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는 독창적인 장르의 예술이다. 그러므로 많은 영화들이 나로 하여금 생각에 잠기게 하였고 그때마다 나는 조금씩 자라났다. 한편의 영화가 던져준 씨앗 같은 화두를 하나 붙잡고서 나는 생각을 한다. 이제는 하루만 지나도 영화의 내용이 다 잊혀지는 지경이지만, 가지치고 뿌리내리는 생각의 나무는 계속 자란다. 그렇게 영화는 화두를 던져주고 나는 숙제를 했다. 그렇게 지난 20개월 동안 2주일에 한번씩 숙제를 제출한 것이 이 ‘오 컬트’ 지면이었다. 주기적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글로 쓰고, 제출하는 동안 덕분에 나는 또 많이 자랐다. 이제 숙제를 제출하는 글쓰기는 오늘로 졸업을 하지만, 영화와의 즐거운 교감은 영원하리라. 인사드리오니, 졸필에 귀한 지면을 할애해준 <씨네21> 편집부에 감사드리고, 읽어주신 모든 독자들에게 감사드리고, 이 세상 모든 영화에 감사한다.
모두 감사합니다. 그리고 안녕히.김형태/ 무규칙이종예술가 kongtem@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