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News & Report > News > 국내뉴스
[영화비평릴레이] <선택> - 허문영 영화평론가
2003-10-28

통일 염원을 담아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홍기선 감독은 말했다.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나에겐 감독의 의도를 벗어나 이 영화를 느낄 권리가 있다. 이 영화는 통일의 대의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느껴진다. 게다가 특정한 이념이나 체제와도 전혀 무관하다. 사회주의자로서 45년 동안 남한의 감옥에 갇혀 있었고, 마침내 석방되자 곧바로 북한행을 자처한 장기수 김선명의 수감생활을 그린 영화가 이념과도 통일과도 무관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념도 휴머니즘도 아니다. 그건 명예다, 존웨인같은…

놀랍게도 이 영화는 특정한 이념에 대해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선택〉이란 영화 안에선 주인공이 북한과 사회주의를 신뢰하게 된 이유를 전혀 알 수 없다. 그 믿음을 자신의 전 존재를 바쳐 지켜낸 근거도 드러나지 않는다. 물론, 남한 체제나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별다른 논평이 없다. 그러나 〈선택〉을 보면서 그건 전혀 궁금해지지 않는다. (물론 이성적 인간이 사회주의를 진심으로 믿는다는 것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에 동의하는 사람들에게만 그럴 것이다)

이념을 초월한 휴머니즘을 말하려는 건 아니다. 이념을 초월한다는 건 대개 위장이거나 환상이다. 이념은 휴머니즘이 훌쩍거릴 수 있는 공간을 자신의 변두리에 간혹 허용해 왔을 뿐, 결코 자신의 상위에 오르는 걸 용납하지 않는다. 더구나 〈선택〉은 휴머니즘이 아니라 끝내 이념을 선택한 한 인간에 관한 영화다. 그러나 〈선택〉은 이념 자체에 대해선 함구한다. 〈선택〉은 전위도 혁명가도 될 자질이 없어 보이는 한 초췌한 남자가 자신의 신념을 철회하지 않은 대가로 치른 기나긴 짐승의 시간에 관한 영화다. 그리고 부서질 듯 나약한 육체로 온갖 고통과 인간적 슬픔을 거치고도 끝내 자존을 지키는 모습이 주체하기 힘든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영화다.

〈선택〉의 감옥은, 체제와 이념이 아니라 오로지 가둔 자와 갇힌 자의 본능이 충돌하는 공간이다. 양자는 논쟁하지 않는다. 가둔 자는 갇힌 자에게 ‘정상’을 폭력적으로 강요하고, 갇힌 자는 자신의 ‘비정상’을 끝내 반성하지 않는다. 갇힌 자가 지키려 하는 것은 미래나 전망에 속해 있지 않고 과거에 들어 있다. 이 점이 중요하다. 영화 속의 김선명은 골수 사회주의자이지만 자신의 이념을 실현시키기 위한 어떤 계획도 의지도 갖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다. 그는 여전히 자전거포를 내는 것말곤 별다른 소망이 없다. 그는 다만 사회주의를 부인할 수 없을 뿐이다. 그는 젊어서 한 이념을 믿었고, 그 믿음을 버려야 할 내적 이유를 45년이 지나서도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에게 그 믿음은 신체의 일부나 다름없다. 그의 선택은 실은 이념적 선택이 아니라 육체적 선택이다.

그가 병든 구순 노모를 버려두고 북한행을 결행하는 까닭도 북한을 더 살기 좋은 곳이라고 믿었다거나 사회주의 이념에 봉사하기 위해서라고 추정할 근거도 영화 속에선 없다. 그가 돌아간 곳, 정확히 말해 그가 돌아가려고 한 곳은 현재의 북한이 아니라 과거의 북한이다. 내게 그가 돌아간 곳은 사회주의 공동체라는 상상적 공간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그가 이동한 것이 아니라 사라져간 것처럼 느껴진다. 그는 미래의 희망이 아니라, 상상적 과거에서 소멸하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선택〉은 이념이 아니라 명예에 관한 영화다. 혹은 명예의 인간에 관한 영화다. 그는 자신이 공표한 신념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에 무한대의 책임을 지는, 시대착오적인 인물이다. 그에게 명예율은 모든 가치에 앞선다. 나는 〈선택〉을 장르영화라고 생각한다. 이상한 일이지만 〈선택〉은 고전적 서부극을 연상시킨다. 〈선택〉의 잔상은 존 웨인이 절룩거리며 황야로 사라져 가는 〈수색자〉의 마지막 장면과 겹쳐진다. 10여 년 전에 정성일은 이 지면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걸작 〈용서받지 못할 자〉의 길을 장르적 리얼리즘이라고 불렀다. 장르적 관습을 경유해 현실의 통찰에 이른 〈용서받지 못할 자〉와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는 의미에서 나는 〈선택〉의 길을 리얼리즘의 장르라고 부르고 싶다. 그게 내가 〈선택〉이란 영화를 사랑하는 방식이다. 허문영/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