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모토(니시지마 히데토시)는 부모의 강요로 오랜 연인이던 사와코(간노 미호)와 헤어진다. 그리고 사장 딸과 결혼하려고 한다. 결혼식 날 사와코가 자살을 기도하고 정신이 이상해졌다는 소식을 들은 마쓰모토는 어디론가 사라진다. 사와코를 병원에서 데리고 나온 그는 서로의 몸을 끈으로 묶고 정처없이 길을 떠난다. 야쿠자 보스 히로(미하시 다쓰야)는 젊은 시절, 사랑하던 여인이 있었다. 그들은 주말이면 공원 벤치에서 도시락을 먹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이별을 고한 히로는 여인과 헤어진다. 몇 십년 뒤, 공원을 찾은 히로는 어느 여인이 도시락을 지닌 채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모습을 발견한다. 한편 여름 바닷가. 사고로 재기불능 상태가 된 하루나(후카다 교코)는 팬들 앞에서 모습을 감춘 채 은둔생활을 한다. 그런 하루나에게 어느 날 맹인남자인 누쿠이(다케시게 쓰토무)가 찾아온다. 하루나가 은퇴한 뒤 아무도 만나고 싶어하지 않자 열성팬인 누쿠이는 스스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된 뒤 그녀를 방문한 것이다. 하루나는 누쿠이의 사연을 듣고 깜짝 놀란다.
■ Review여러 종류의 사랑 노래가 있다, 고 생각한다. 어떤 연가(戀歌)는 듣는 사람을 한순간에 무력하게 만든다. 갑작스럽게 눈물을 왈칵 쏟게 하는 노래도 세상엔 있다. 그런가 하면 무심한 연가도 있다. 무심코 스쳐지나는 어떤 노래는 아무런 감흥을 남기지 않는 것 같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고 의미를 곱씹으면 듣는 이에게 깊고 넓은 파장을 남기는 음악이 있는 것이다. <돌스>는 비유하자면 후자에 가깝다. 무심한 멜로디와 가사로 몰입하기 어렵지만 귀를 기울인다면 이 기구한 연가는, 우리가 아는 세상의 모든 사랑에 대해 노래한다.
<돌스>는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영화다. <하나비>와 <소나티네> 등 감독의 전작을 본 사람이라면 다케시 감독의 영화가 그리 호락하지 않음을 기억할 것이다. 어쩌면 과묵한 대사보다 ‘다케시 블루’, 즉 영화의 색채감만 떠오를지 모른다. 다케시 영화는 감독처럼 미스터리 같은 구석이 있다. 기타노 다케시는 코미디언과 영화배우, 공중파 MC와 소설가 등 다양한 일을 병행하고 있는 중이다. 직업정신은 놀랄 만하다. 이런 식이다.
TV 프로그램을 보면 그는 ‘나=돌머리’라는 글자가 또렷하게 새겨진 모자를 쓰고 토크쇼를 진행한다. 영화감독으로서는 다르다. 특히 해외영화인, 기자를 만나면 이사람 태도가 180도 싹 바뀐다. “영화는 역시 오즈 야스지로와 로베르 브레송, 타르코프스키…. 다른 영화는 알지도 못하고…”라고 읊어대면서 심각한 이야기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솔직히 뇌를 꺼내 해부해보면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할 정도다. 1980년대 이후 일본 작가영화 계보에서 기타노 다케시는 독보적 존재다. 청춘물과 야쿠자영화 등 장르영화의 껍데기를 두른 그의 영화들은 죽음과 삶, 폭력과 웃음이라는 화합하기 힘든 요소가 공존한다. 2002년작 <돌스>는 기타노 다케시의 전작을 한데 뭉쳐 반죽한 듯한 영화다.
<돌스>는 사와코와 마쓰모토의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마쓰모토의 배신으로 사와코는 제정신을 잃는다. 한마디로, 미친 것이다. 결혼식장에서 사와코 소식을 들은 마쓰모토는 그녀를 데리고 어디론가 떠난다. 하지만 예전의 애인은 총명한 눈빛을 잃었다. 말도 횡설수설을 반복한다. 참다 못한 남자는 아예 여자의 몸과 자신의 몸을 붉은 끈으로 묶어버린다. 질긴 운명의 끈이다. 다음 이야기는 히로라는 야쿠자 보스에 관한 것. 몇 십년 전, “매주 토요일마다 도시락을 싸서 공원에서 당신을 기다릴 겁니다”라고 공언한 사람이 그에겐 있었다. 불현듯 과거가 생각난 노인은 공원으로 간다. 그곳엔 한 여성이 신기하게도 도시락을 준비한 채 다소곳이 앉아 있다.
여기 한 에피소드가 추가된다. 여자가수를 흠모하던 팬이 얼굴이 망가진 그녀를 만나기 위해 스스로 눈을 베어버린 뒤, 옛 스타를 찾아간다. 배신과 약속, 동경의 모티브가 얽히면서 <돌스>는 일본의 사계를 배경으로 하는 기막힌 러브스토리가 된다.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에서 <소나티네> <기쿠지로의 여름>까지 영화는 기타노 감독의 이전 영화의 각 장면을 반복하고 또 인용한다.
흔해빠진 사랑 이야기를 보충하기 위해 영화는 일본 전통극의 형식을 빌려온다. 영화 시작과 마무리를 분라쿠(文樂)의 장면으로 처리하고 있는 것이다. 분라쿠는 음악과 해설, 그리고 인형의 움직임으로 이루어진 일본 전통극. 일본 누벨바그의 감독인 시노다 마사히로 감독은 <심중천망도>(1969)에서 영화와 분라쿠의 표현기법을 결합한 적이 있다. 전통 무대극과 영화의 미학이 만나는 것은 그러므로, <돌스>가 처음은 아니다. <돌스>가 보여주는 영화 속 장면은 전통극보다 회화의 그것에 근접한다.
설경을 뒤로 하면서 하나의 붉은 끈에 묶인 연인들이 뭔가에 홀린 듯 걸어가는 모습은 <돌스>가 탐미적인 영화임을 말한다. 극단적으로 회화 같은 장면이다. 그러고보니 언젠가 기타노 다케시 감독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꿈>(1990)에 대해 논했다. “영화 속 각 장면이 회화적이고 사진적인 완성도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영화라고 칭한 적이 있다. 같은 이유로 <돌스>는 비록 이전 기타노 영화에 비해 맥없는 듯한 구석도 없지 않지만 틀림없는 작가의 영화다. 일본에서의 평은 엇갈렸다. 오시마 나기사의 <고하토>가 그랬듯, <돌스>는 ‘탐미주의’와 ‘지루한 실험’이라는 상반된 객석의 반응을 얻었다. 개인적으로는, 만족스런 영화였다는 것에 한표.
:: 야마모토 요지의 의상옷으로 사랑을 노래해요
<돌스>는 의상이 눈에 띈다. 영화에서 옷을 담당한 사람은 야마모토 요지. 그는 1980년대에 무채색을 기본으로 하는 디자인으로 유럽 무대에 디자이너로서 데뷔했다. 기존 패션의 통념을 깨뜨리는 파격적인 디자인과 색감의 선택은 야마모토 요지를 국제 무대에서 인정받게 했다. 전위적인 뉘앙스마저 풍기는 야마모토 요지의 옷들은 ‘거지’ 패션이라는 신조어를 낳기도 했다. 이후 파리를 무대로 하는 각종 행사에 참가하면서 야마모토 요지는 활동을 계속했으며 사카모토 류이치의 오페라 <라이프>에서 의상을 맡아 화제를 낳기도 했다. 기타노 다케시 감독과 술자리에서 만난 그는 <돌스> 작업에 참가하게 되었고 영화제작 이전부터 그는 <돌스>를 일종의 “패션쇼 무대”라고 여긴다는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일본 전통극에서 힌트를 얻은 야마모토 요지의 영화 속 의상들은 원색적이고 화려한 색감과 독창적인 디자인이 특징적이다.
사와코 등이 입는 붉은 옷은 사랑의 열정을 표현하는 것이며 이후 영화 속 의상은 무채색 계열로 돌변하면서 죽음의 이미지를 나타내고 있다. 야마모토 요지는 <돌스>에서 일본 전통의상인 도테라 역시 선보이고 있다. 중세의 자료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의상 디자이너는 4개월 동안 수작업을 거쳐 도테라를 완성했고 이 의상은 마쓰모토와 사와코의 사랑이 초현실과 신화의 세계로 비약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하고 있다. <돌스>에서 마쓰모토와 사와코는 계절을 통과한다. 봄에서 여름, 그리고 겨울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이곳저곳을 방황하고 있는 것. 결국 한겨울, 눈내리는 풍경에 안착한 이들은 도테라를 입고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도 뛰어넘어버린다. 운명의 끈으로 이어진 연인들의 행보와 전통극의 형식, 그리고 아름다운 의상의 조화는 보는 이의 찬사를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