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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비평릴레이] <아카시아> - 김소영 교수
2003-10-21

<아카시아>에서 처음 공포의 주술을 걸어오는 것은, 여섯 살 아이 진성이다. 진성은 엄마를 잃은 뒤 고아원에서, 세상과 사물의 경계가 모호하며 인물은 절규하는 그림을 그린다. 예컨대 그는 여섯살박이 뭉크다. 그가 필사적으로 담고자 하는 것은 죽어 나무가 되었다는 엄마의 형상이다. 죽은 엄마는 그림 속에서 흐릿하게나마 환생해 아이에게 돌아온다.

타는 듯한 붉은색 강도가 관객의 내장까지 못파고든다

이 주술을 제일 먼저 알아챈 사람이 진성의 그림을 보게 된 미숙(심혜진)이다. 직물공예를 하는 미숙에겐 결혼 10년이 지나도 아이가 없다. 그래서 그녀 가족은 진성을 입양한다. <아카시아>는 공포 영화이므로 이 작은 타자가 집안에 들어 온 후 물론 모든 것이 달라진다. 미숙이 진성의 그림에서 부지불식간에 엿본 그 무엇이 이 집을 기습하기 때문이다. 사실 미숙이 진성의 그림에서 알아 챈 것은 놀라운 재능과 절대적 그리움이다. 그 두 가지가 엄마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 속에서 그림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그에 비해 미숙의 삶은 단조롭고 반복적이다. 산부인과 의사인 남편 도일과 화가인 시아버지와 전원주택에서 부유한 생활을 꾸려가고 있다.

입양한 뒤 첫번째 장면에서 진성과 미숙은 함께 방안에 있다. 진성은 그림을 그리고 미숙은 직물을 짜고 있다. 미숙은 진성의 분신격인 벌레를 눌러 죽인다. 또 이름을 이진성에서 김진성으로 바꾸라고 말한다. 미숙의 이런 태도에 대에 진성은 그녀의 태피스트리를 풀어버리는 것으로 대응한다. 다소 심심한 무늬의 직물 작업을 하던 미숙이 진정한 자신의 예술적 태피스트리를 짜고 연출하는 순간은, 진성이 죽고 난 후다. 아니 그를 죽이고 난 후다.

여성주의 예술가인 루이스 부르주아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교외에 위치한 부유한 집 실내를 거미줄처럼 덮은 미숙의 붉은 태피스트리 작품은 진성이 살아있을 때 꾼 악몽의 재현이다. 그 꿈속에서 미숙의 붉은 실은 살아 움직이며 소년을 노린 적이 있었다. 소년의 악몽은 이제 온전히 미숙의 작품으로 옮겨진다. 이 모든 사태에 경악한 남편에게 미숙은 진성이 죽이라고 했다며 가위를 빼어든다. 죽은 엄마가 진성의 그림으로 환생했다면, 진성은 이제 미숙으로 환생한 셈이다. 그러나 차이는 미숙이 진성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요점은 알려진 것과는 달리 <아카시아>는 입양된 타자의 존재를 빌어 가족과 그 해체를 이야기하는 영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영화의 진정한 핵심은 재능 있는 진성과 그를 알아보는 미숙이라는 짝패다. 직물 짜는 신화 속의 여자 페넬로페로서의 주부 미숙의 삶은 진성을 받아들이는 순간, 20세기 루이스 부르주아의 자이언트 거미의 세계, 모성의 세계로 옮겨간다. 그곳은 사랑과 증오, 삶과 죽음이 동시적으로 작동하는 세계다. 아니, 옮겨가고자 한다. 하지만 그녀가 죽기 직전 재현하는 예의 붉은 장면(포스터에 사용)은 결국 진성의 비전이다. 그 타는 듯한 붉은 색의 강도가 관객의 내장까지 파고들지 못하는 이유는 진성의 것으로 보기에 그것은 지나치게 어른의 세계이며 그렇다고 미숙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질문은 이 영화는 누구의 공포를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가하는 점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 질문을 끌어안는 대신 부주의하게 이리저리 미끄러짐으로써 가짜 혹은 유사- 트라우마에 기반을 둔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아카시아>가 발생시키는 공포 역시 역사나 사회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공포 영화들을 참조하는 안전핀을 끼운 장르적, 미학적 공포로 수위 조정된다. 아이든, 여자든 상처 때문에 결코 포섭되지 않는 타자를 그리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가 김소영/영상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