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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의 기적> 독일의 희망 되찾기를 자극하는 영화
2003-10-17

한 편의 영화가 총리를 비롯해 독일 사회를 울리고 있다. 50년 만에 영화로 되살아난, 어려웠던 시절의 가슴 벅찼던 일이 경제침체와 사회적 갈등에 시달리는 독일에 다시 일체감과 희망을 불어넣어 줄 것인가? 지난 16일 저녁 독일 서부 에센(市)의 리히트부르크 극장에는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를 비롯해 루디 푈러 국가대표 축구팀 감독 등 독일의 각계 인사 1천300명이 모였다. 죈케 보르트만 감독의 영화 <베른의 기적> 시사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영화의 제목은 1954년 스위스 베른 월드컵에서 독일이 헝가리에 2대 0으로 지다가 3대2로 기적적으로 역전승하며 우승한 일을 가리킨다. 주인공 마티아스는 루르 탄광지대 에센에 사는 11세 소년. 2차대전이 끝난 지도 10년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소년의 영웅은 에센 출신의 국가대표 축구팀 주장 헬무트 란.

드디어 아버지가 소련의 포로수용소에서 귀향, 기차역에 내린다. 그러나 아버지는 마중나온 딸을 부인으로 착각하고 아들은 알아보지도 못한다. 사회에 적응못하는 아버지는 가족과도 괴리감을 느낀다. 월드컵 결승전을 라디오로 듣던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무작정 베른으로 간다.

후반전이 시작된 후 경기장에 도착해 그라운드에 잠입한 마티아스는 란에게 사이드라인 아웃된 공을 던져준다. 이 공을 받아 란은 결승골을 넣는다. 가족이 화해하는 가운데 대표팀은 국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특별기차편으로 귀국한다.

이 영화는 지난 8월 스위스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관객상을 받았으나 비평가들로부터는 지나치게 감상적인 통속물이라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이날 시사회 개막식에서 슈뢰더 총리는 "비평가들은 원하지 않겠지만 일반 대중은 매우 좋아할 것이며, 크게 성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슈뢰더 총리는 이어 "영화가 전달하는 역사가 심금을 울린다"면서 "영화의 첫 편집판을 앞서 봤을 때 울었다"고 토로했다.

독일 언론도 이날 시사회가 끝난 뒤 "총리를 세 번이나 울게 만든" 이 영화에 대해 대대적으로 소개했다. 감상적인 멜로물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열렬한 축구 왕국인 독일에서 이 영화가 큰 성공을 거둘 것으로 전망했다. 축구 팬이 아니더라도 새로운 희망과 귀속감을 느끼게 하는 영화라는 것이다.

역사학자 요아힘 페스트는 "1954년 7월 4일 베른 월드컵 우승은, 당시 독일 사회가 전쟁 뒤에 짓눌려왔던 모든 것에서 일종의 해방감을 주는 것이었다"면서 "어떤 의미에선 서독연방공화국의 시작이었다"고 평가했다. 히틀러의 망령과 전후 폐허에 시달리던 독일 국민들이 월드컵 우승으로 다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는 느낌을 받게 됐다는 분석도 있다. 어찌됐든 독일은 이후 경제 재건을 시작해 라인강의 기적을 이뤘다.

보르트만 감독도 "월드컵 우승은 당시 독일인에게 새로운 활기와 일체감을 주고, 나치시대와는 다른 의미의 집단적 행복감을 줬다"면서 이 경기와 어느 소년 그리고 그 가족과 독일 사회를 교차시키며 자기정체성을 찾아가는 인간과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 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 통속적이라는 비판에 대해 "누구에게도 해를 주지 않는 방법으로 애국심을 보여주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응수했다.

이 때문에 이 영화는 장기 경기침체 속에서 통일 이후의 사회적 갈등에 시달리는 독일인들의 감성과 자부심을 자극하고, 희망을 되찾자는 정서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과거의 파괴적이고 배타적인 독일의 민족주의를 경험한 일각에선 노파심을 갖고 있기도 하다.

슈뢰더 총리는 이날 시사회에서 푈러 국가대표 축구팀 감독에게 "루디, 2006년에 판가름나네"라고 소리쳤다. 2006년은 독일 월드컵이 개최되는 해이자 총선이 열리는 해다. 지지율이 사상 최저수준으로 추락한 사회민주당과 총리는 2010년까지 독일 사회를 개조해 국가적 경쟁력을 강화하려 하고 있다. 슈뢰더 총리는 그 일환인 경제개혁안의 효과가 나타나면 재집권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한편 이날 시사회장엔 54년 월드컵 우승 당시 활약했던 호르스트 에켈과 오트마르 발터 선수가 참석했다. 그러나 두 골을 넣은 주역인 란은 지난 7월 74세 생일을 앞두고 이 영화를 보지 못한 채 질병으로 사망했다.

할리우드의 위세에 짓눌려온 독일 영화계는 <아프리카 어느 곳에서>가 아카데미 외국영화상을 받고 통독 직후 사회상을 그린 <레닌의 추억>이 크게 성공한데 이어 <베른의 기적>까지 호평을 받자 자존심 회복과 시장 점유율 향상을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