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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과 관객: <파리,텍사스>
강유원(철학박사) 2003-10-16

영화를 보러 가는 관객의 가장 기본적인 목적은 극장비를 건지는 데 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경우에 ‘극장비를 건졌다’고 판단하는지가 관객마다 다르다는 데 있다. 이는 영화 관객만이 아니라 자기 돈과 시간을 들여서 뭔가를 보거나 읽는, 모든 관객 또는 독자에게 해당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물론 가끔은 돈과 시간을 전혀 들이지 않고 지나가다 우연히 건성으로 본 것에 대해 욕을 바가지로 하거나 뜻밖의 소득에 기뻐하는 관객이나 독자가 있을 수는 있다.

앞서 제기된 문제는 영화의 본질에 대한 관객의 기준이 제각기 다르기 때문에 생겨난다. 다시 말해서 관객은 저마다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이루는 핵심적인 요소의 기준을 명시적으로나 암묵적으로나 가지고 있고, 이러한 보편적 기준을 근거로 삼아 개별적인 영화를 보며, 그 영화에서 자신이 가진 보편적 기준에 합치하는 것을 많이 발견했을수록 ‘극장비를 건졌다’고 판단하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를 일종의 텍스트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서 텍스트를 ‘기호들이 어떤 코드에 입각해서 통일성을 이룬 구체적인 기호학적 체계’라고, 기호학에서 읊어대는 고상한 정의로 규정하지 말고, 그냥 손쉽게 ‘의미를 가진, 또는 어떤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덩어리’라고 해보자. 그런 관객은 영화에서 의미를 발견하고자 한다. 즉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발견하고 공감했으면 만족하는 것이다. 이런 관객을 우리는 ‘의미 중심적 관객’이라 불러도 괜찮을 것이다.

영화는 아무래도 등장인물의 면면과 액션이 본질적 요소로 자리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관객은 영화를 볼 때 이것저것 쳐다보지 않고 오로지 배우만 볼 것이다. 영화 <대부>가 파치노의 영화냐 아니냐를 놓고 따진다면, 또는 그로밋이 너무 좋아서 <월레스와 그로밋>을 외우도록 본다면 그는 ‘배우 중심적 관객’에 속할 것이다. 이들은 그 영화가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에 아주 무관심할 수도 있다. 맘에 드는 배우가 나오고 그 시간 동안 그 배우를 흠뻑 즐겼으면 그만인 것이다.

귀가 민감하고 평소에 음악이 세상에서 가장 보편적인 언어라고 여기는 이라면 영화를 보기보다는 아예 눈을 감고 듣기만 할지도 모른다. 그는 약간 더 배려해서 어떤 액션이나 장면에서 음악이 얼마나 잘 깔리는지에 바짝 신경을 쓸지도 모른다. 이러한 관객은 아마 ‘음악 중심적 관객’일 것이다.

배우고 음악이고 메시지고 다 관두고 영화가 얼마나 치밀한 구조로 짜여져 있느냐만을 따지는 관객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눈은 화면을 보고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표면의 배후로 파고들어 온갖 숨어 있는 것들을 찾아내기에 바쁠 이러한 관객은 ‘구조 중심적 또는 형식주의적 관객’이 아닐까?

그 밖에도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이 주고받는 대사의 묘미만을 즐기는 담화 중심적 관객도 있을 수 있겠고, 의상이나 장치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챙기는 미감 중심적 관객, 여자가 얼마나 홀대받는지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관객 등도 있을 수 있다.

영화라는 텍스트는 이 모든 관객이 알아서 제멋대로 해석할 수 있는, 말 그대로 ‘열린 텍스트’다. 감독이나 배우가 어떤 의도를 가졌는지, 영화음악가가 왜 그 음악을 썼는지, 편집은 왜 그렇게 했는지 따위는 영화가 스크린에 펼쳐져서 관객에 보여지는 순간 아무런 힘도 가지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관객은 영화를 보고 나서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 ‘감독이 참 싸가지 있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구먼’ 또는 ‘음악이 가슴 한쪽을 찢어내네 그려, 이 너덜너덜해진 가슴 좀 봐’ 또는 ‘그 남자, 옷을 왜 그리 거지같이 입고 나왔나’ 또는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소리만 하고 자빠졌군, 시나리오에 아무 성의가 안 보여’….

킨스키를 보기 위해 <파리, 텍사스>를 본다. 의사소통의 부재라는 메시지도, 라이 쿠더의 음악도, 지루한 화면구성 등도 모두 다 우연히 그 영화에 들어온 것들일 뿐이다. 내게는 킨스키만이 실체성(實體性)이고, 나머지는 우유성(偶有性)이다.강유원/ 회사원·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