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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영화] ‘황상벌’에서 웃다가 울어보시겠소?
2003-10-14

서기 660년 당나라 소정방의 군대 15만명이 지금의 덕적도 앞에 배를 댄다. 소정방은 신라 김유신에게 7월10일까지 보급품을 갖고 오지 않으면, 백제의 처리를 신라의 손이 아니라 당나라가 맡겠다고 선언한다. 현실주의자 김유신과 우직한 계백이 5만과 5천 군사를 이끌고 맞부딪쳤으니 그곳이 바로 황산벌이다.

계백장군과 5천 결사대, 의자왕과 3천 궁녀… 어릴 적 국사교과서에서 줄 쫙쫙 치며 배우던 백제의 마지막 모습은 불과 몇 줄. 훗날 승자의 기록인 <삼국사기>를 근거로 만들어진 이 땅의 교과서에서 백제는 퇴폐하고 방탕한 왕실 덕분에 김춘추와 김유신이라는 지장과 명장에게 무릎꿇은 패배자일 뿐이다. 포복절도의 웃음과 뒷머리 치는 강렬한 메시지를 동시에 품은 ‘퓨전 사극’을 표방한 <황산벌>은 황산벌에 있던 장군들과 무수한 장삼이사 ‘거시기들’을 상상력으로 되살려냈다. 오늘날 국제정치와 여의도 정치인들에 대한 날선 풍자 속에 휴머니즘적인 반전 메시지를 확실히 전하는 이 심각한 주제의 영화의 미덕은 ‘심각하지 않다’는 데 있다.

사극으로선 불가능한 예산(순제작비 35억원)을 갖고 영화는 아이디어로 정면돌파를 해낸다. 맞짱뜨기, 기마전, 욕싸움 등 다양한 형태의 전쟁이 그것이다. 주먹감자 먹이기·무릎 감자 먹이기 등으로 불리해진 백제군이 “보성·벌교쪽 불러들여!” 한마디 하자, 단숨에 욕싸움에서 신라군을 제압해버리는 장면은 보는 이들의 웃음소리에 가려 대사가 잘 안 들릴 정도다. ‘거시기’라는 백제군의 사투리를 암호로 알아듣고 낑낑거리며 해독하는 신라의 모습도 마찬가지.

세련되고 매끄러운 영화문법에 익숙한 이들에겐 매우 거친 듯 보이지만, 대사가 한 마디 이상 있는 배우만 70명이 출연하는 <황산벌>은 그들을 하나씩 부각시키는 세심한 배려를 잊지 않는다. 패자인 계백에 초점이 가면서도, 전쟁보다 정치에 능한 현실주의자이면서 “전쟁은 미친 짓”이라 내뱉는 김유신의 허무한 표정까지 잡아낼 때 영화는 역사책 행간에 숨은 이들의 고뇌까지 실어 나르는 데 성공한다. 여기엔 핏발 선 눈빛으로 연기한 계백역 박중훈의 무게감과 때론 이죽거리며 갈등을 내비치는 김유신역 정진영의 정교함이 큰 몫을 했다. ‘인간장기’부터 마지막 싸움에 이르는 처절한 화면 속에서, 전쟁의 부질없음은 그 어떤 역사책에서보다 강렬하다. 이라크 파병문제가 대두된 지금 시기에선 더욱. 17일 개봉. 김영희 기자 do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