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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다가 울다가 “역시 아리랑”
2003-10-10

이두용 감독의 ‘아리랑’ 평양 시사회 동행취재기

지난 9월30일부터 10월4일까지, 이두용 감독의 영화 <아리랑>의 평양 시사회 참가 및 남북영화 합작사업 추진을 위해 남한의 영화 관계자 6명이 북한을 방문했다. 주코그룹 주수도 회장을 단장으로 하고, <아리랑>을 제작한 시오리 엔터테인먼트의 이철민 대표와 조성인 이사, 주코그룹 산하 제이유프로덕션 호수정 사장, 영화인협회 신우철 회장, 영화진흥위원회 남북영화교류소위원회 위원인 이민용 감독 등으로 이뤄진 이 방문단의 평양일정을 <한겨레>가 단독으로 동행 취재했다. 편집자

[사진설명]<아리랑> 시사회가 열린 평양국제영화회관 앞에 선 북한방문단과 북한배우들. 오른쪽에서 네번째 한복을 입은 배우가 리금순./<아리랑> 시사회가 끝난 직후의 상여장. 관객들이 기립 박수를 보내고 있다./인민배우 김윤홍(왼쪽)과 김춘송 감독(가운데)/조선예술영화촬영소의 일본마을 세트.

평양 순안비행장 입국심사대. 여권을 건네주고 기다리며 서 있는 나에게 심사원이 물었다. “앞에 들어간 영화 관계자들과 일행이십니까”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난데 없는 대답이 나왔다. “예스!” 목소리도 컸다. 뒤에 줄서 있는 사람들의 동그래진 눈을 의식하며 얼굴을 붉힌 채 황급히 검색대를 통과했다. 영어도 잘 못하는 주제에 우리말하는 동포에게 ‘예스’라니! 낭패감을 이렇게 자위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가보는 평양의 입구에서 그렇게 긴장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라고….

도착 당일(9월30일) 밤, 숙소인 양각도 호텔에서 북한 조찬구 문화부상(우리식으로 하면 문화부 차관)이 주최한 만찬이 열렸다. 그는 6·25때 7살의 나이로 전쟁고아가 됐지만 커서 영화평론가, 신문기자, 대학학장 등을 거친 지식인이었다. 지난해 10월에 평양의 문화예술인과 시민 300명을 상대로 열린 <아리랑> 1차 시사회 때 이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아리랑>은) 영화가 참 잘 됐습니다. 젊은 날의 혈기 같은 게 솟기도 하고. 영화가 재미도 중요하겠지만 역사를 다룰 때 만큼은 철저히 사실주의에 입각해야 합니다. 우키시마 마루호 사건을 다룬 일본 영화(<아시안 블루>)를 봤는데 결말이 다 용서하고 잊자는 거예요. 그건 틀렸지요. 그런 역사는 잊어버리면 되풀이됩니다. 우리가 그 사건을 다룬 영화(<살아 있는 령혼들>)는 다르지 않습니까.” 같은 맥락에서 조 부상은 지금 북한에서 독도문제를 다룬 <피묻은 략패>를 촬영중이라고 전했다.

독도문제 다룬 대작 사극 <피묻은 략패>

조 부상은 <피묻은 략패>의 제작을 말하면서 자랑스런 표정을 지었지만 영화의 구체적인 내용은 말하기를 꺼리는 듯했다. 뒤에 인민배우 김윤홍이 들려준 바에 따르면, 북한은 1년에 20~24편의 ‘예술영화’(극영화)를 찍으며 현대물과 사극의 비중이 9대1 가량이다. 1990년대부터 현대물의 비중을 크게 늘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평양 방문에서 만난 북한 영화관계자들은 현대물에 대해 얘기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다. 아마도 현대물은 국내용이 많고, 대외적으로 홍보하고 수출도 하는 영화는 사극인 듯했다. <피묻은 략패>는 2000년 작 <살아 있는 령혼들>, 2002년작 <청자의 넋>을 잇는, 국가적 차원에서 제작을 주도하는 대작으로 보였다. 조 부상은 “보통 영화들은 감독이 아이디어를 내지만, 이런 큰 영화는 (국가에서) 감독을 정하지요”라고 말했다.

감독은 촬영기사 출신으로 <청자의 넋>으로 데뷔한 표광이 맡고, 남한 텔레비전에서 방영한 <림꺽정>으로 남한에도 얼굴을 알린 인민배우 최창수(61), <살아 있는 령혼들>과 <청자의 넋>의 주연으로 지금 북한에서 가장 인기 좋은 여배우로 꼽히는 김련화(34)가 출연한다고. 지금 막바지 촬영중이며 후반작업 거쳐 11월중에 북한에서 상영될 예정이라고 조 부상은 전했다.

인민배우 김윤홍, ‘계월향’ 리금순

10월2일 오전에 <아리랑>의 2차 시사회가 열렸다. 평양영화제가 열리는 장소이기도 한 평양 국제영화회관 안 300석 규모의 상영관에는 북한 영화예술인과 김일성 종합대학, 김책공업대학, 김형직사범대학, 음악무용대학 등 4개 대학 학생들이 자리를 가득 채웠다. 행사를 담당한 북한의 한 관계자는 대학생들 중 지원자가 많아서 참석자를 정하는 데 애를 먹었다고 전했다. 상영 도중 여러차례 웃음이 나왔고 비극으로 끝나는 결말 부분에선 몇몇 곳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리랑> 상영에 이어 15분 가량 휴식한 뒤 북한영화 <살아 있는 령혼들>을 이어 틀었다. <살아 있는 령혼들>은 1945년 해방 직후 일본에 살던 한국 동포들 수천명을 싣고 한국으로 올 예정이었던 선박 우키시마 마루호가 침몰해버린 사건을 다룬 영화로 남한에서 수입이 추진되다가 실패했다.

시사회 뒤 <살아 있는 령혼들>에 출연한 인민배우 김윤홍(57)과 김춘송 감독, 시사회 사회를 맡은 여배우 리금순과 배우 정광남이 북한 방문단과 함께 점심식사를 했다. “(<아리랑>은) 의상, 소도구가 30년대 맛이 나게 잘 고증됐습니다. 주인공 영진이가 마지막에 춤추는 장면에서 감독의 의도가 잘 나타난 것 같습니다. 민족의 긍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김윤홍) “(나운규가 감독한) 원작은 못 봤지만 <아리랑>은 민족의 상징인데 이런 소재로 영화를 만들어온 데 대해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왜놈들에 대한 항거의 정신이, 민족주의의 감정이 영화 전반에 풍기는 게 좋았습니다.”(김춘송)

<살아 있는 령혼들>에서 악역인 일본인 헌병장교역을 맡은 김윤홍은 37년 동안 150편에 출연한 노장배우다. 실제로 볼 때 얼굴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풍부했고 농담을 즐겨하는 모습이 여유로워 보였다. “작고하신 영화작가 리종순 선생이 명언을 남겼는데, 여자배우는 성적 매력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 그래야 90분을 볼 수 있죠. 남자배우도 여자들에게 성적 매력이 있어야 하고.” 방문단 중 한명이 “김윤홍 선생도 성적 매력이 풍부하시다”는 말을 건넸다. 그랬더니 바로 “제가 여자를 좋아하지요”라고 답한다. 리금순은 한 사극에 계월향 역으로 출연해 북한 사람들이 계월향으로 부른다고 했다. 리금순은 김윤홍에 대해 “여배우들이 제일 믿는 남자배우”라며 “촬영장에서 옷 갈아입을 때도 김윤홍 선생이 오면 ‘괜찮다’고 할 정도”라고 말했다. 김윤홍이 받아친다. “내가 그러지요. 너희들 내가 남자라는 걸 무시했다간 큰일난다고.” 김윤홍은 배우로서의 자부심이 확고해 보였다. “1급 영화에 3급 배우가 나오면 3급 영화가 됩니다. 반대로 3급 영화라도 1급 배우가 나오면 1급 영화가 되지요. 배우는 영화의 얼굴입니다.”

조선예술영화촬영소

평양에 있는 조선예술영화촬영소는 남한의 영화인들이라면 탐낼 만했다. 1947년에 설립됐고 지금까지 극영화, 기록영화, 아동영화 합해서 1000편이 이곳에서 제작됐다. 상당수의 북한 감독과 배우들이 이곳 소속 직원으로 월급을 받는다. 배우 150명을 포함해 직원이 2천명이라고 했다. 촬영소 안 전시실에 들어가면 정면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피바다>의 촬영현장에 나가 촬영을 ‘지도’하는 모습을 담은 대형 벽화가 그려져 있다. 여러 방으로 나뉘어진 전시실에는 김 위원장이 ‘비준하여 주신’ 극영화 시나리오들이 진열돼 있다. 안내원이 김 위원장은 <피바다> 촬영장에 114번 방문해 ‘지도’했고, <꽃파는 처녀>는 원래 여주인공 의상이 여러 벌이었던 것을 김 위원장이 ‘그렇게 옷이 많은 여자가 꽃을 팔겠냐’며 한 벌로 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야외 세트는 초가집 동네, 조선시대의 궁궐, 유럽마을, 일본 마을, 중국 마을 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각 마을마다 실제 골목 두 블록 이상되는 규모로 전체 둘레가 40㎞이며 건물이 100동이다. 아쉽게도 영화를 찍는 현장은 만나질 못했다. 평양/ 글·사진 임범 기자 ism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