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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화. 임권택 감독의 ‘오픈 토크’
2003-10-10

제8회 부산국제영화제 회고전의 주인공으로 초대된 정창화(75)(사진) 감독이 9일 오후 부산 해운대 파라다이스호텔 뒤뜰에서 임권택(69) 감독과 함께 `오픈 토크' 자리에 나섰다.임권택 감독은 1956년부터 61년까지 정창화 감독의 연출부에서 스태프로 참여하며 연출 수업을 받았다. 정창화 감독은 60년대 충무로에서 액션영화로 최고봉으로 군림하다가 홍콩의 쇼브라더스에 스카우트돼 미국과 유럽까지 널리 이름을 알렸다.

`한국 액션영화의 전설'로 꼽히는 정창화 감독과 `한국의 국민감독'으로 추앙받는 임권택 감독의 만남은 스승을 향한 존경과 제자에 대한 애정이 듬뿍 묻어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진행됐다. 이용관 부산영화제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중앙대 영화과 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사제간 대화를 정리한다.

먼저 소감을 말씀해주시지요.

▲정창화 = 고국에서 제 영화 회고전을 연다는 소식을 미국에서 처음 듣고는 믿기지 않아 묻고 또 물었지요. 잊혀졌던 영화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임권택 = 제가 유일하게 연출을 배웠던 분이 정창화 감독님이십니다. 그분의 모습과 그분의 영화를 다시 볼 수 있다는 마음에 어느 누구보다 감개무량할 수밖에 없지요.

정 감독님의 근황은 어떠십니까.

▲정 = 미국 캘리포니아 남단 샌디에이고의 소도시에서 조용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한국과 홍콩에서 감독생활을 할 때는 사람들에게 벅차게 치인 것 같아 이곳을 택했지요. 너무 조용하게 지내다보니 영화에 대한 향수가 북받쳐오르고 과거의 추억 속에서 살아갑니다. 가끔 바다낚시나 골프를 즐기며 소일하지요.

임 감독님은 정감독님을 인간적으로나 영화적으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임 = 56년 <장화홍련전>을 할 때 촬영 중간에 제작부 똘마니로 들어갔지요. 당시로서는 제가 감독이 된다는 건 언감생심이었고 사병이 장성 대하듯 우러러볼 수밖에 없었지요. 생김새는 부드러워 보여 여자들도 많이 따랐는데 작품은 엄청나게 터프하지요. 촬영 때도 하도 꼼꼼하고 끈질기고, 어찌 보면 잔인하기 짝이 없었어요. 2층 계단에서 구르는 장면을 찍을 때 우리 같으면 일단 슈팅에 들어가서 좋은 장면을 골라쓰곤 하는데 정 감독님은 리허설 때부터 몇번이고 구르게 한 뒤 만족하면 비로소 촬영에 들어갔지요. 세트를 지을 때도 건성건성 넘어가는 법이 없어요. 제가 만일 다른 감독 밑에서 배웠다면 건성건성하는 버릇이 몸에 배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정 감독님 아래서 훈련받은 것이 지금까지 연출 생활를 해가는 데 큰 힘으로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정 감독님은 임 감독님을 어떻게 보셨나요. 처음부터 대성할 것이라고 짐작하셨나요.

▲정 = 어느날 <장화홍련전>의 제작자인 임 사장이 젊은 청년을 데리고 와서 써줄 것을 부탁했어요. 그때는 이미 스태프가 모두 구성돼 촬영에 들어갔을 때라 하는 수 없이 소품 담당을 시켰지요.(이때 임 감독이 `그거는 두 번째 영화이고 처음에는 제작부 똘마니였다니까요'라고 정정한다) 유달리 다른 스태프보다 부지런해 새벽 4시에 통행금지가 해제될 땐데 5시면 사무실에 나와 준비를 하곤 했어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쓸 만한 청년이라고 생각해 조감독을 맡기겠다고 마음먹었지요. 그뒤 58년 <비련의 섬>을 찍을 때 자리가 비어 정식 조감독으로 기용했지요. 61년 임 감독의 데뷔영화 <두만강아 잘있거라>를 보니 탁월한 역량이 엿보여 훗날 거목이 될 것이란 확신이 들었습니다.

정 감독님이 홍콩으로 건너간 계기 가운데 한국 영화계에 대한 반발심이 있었나요.

▲정 = 그 무렵에는 한국 영화계가 너무 영세해 모든 것을 감독의 역량과 재치에 의존하던 시대였지요. 지금은 무술감독과 스턴트맨도 쓰지만 그때는 아무것도 없었지요. 특수효과 장치도 없어 총격장면에서는 실제 총을 사용했는데 유탄이 제 가슴에 맞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왼쪽 가슴에 꽂은 대본에 박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지요. 그런데 홍콩에 가보니 할리우드에 못지않은 규모와 시설을 갖추고 있더군요. 우리나라에는 촬영소 하나 없던 시절이었거든요.

중국어를 하실 줄 알았던 것도 도움이 됐겠군요.

▲정 = 학창시절 외국어를 선택과목으로 들었는데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영어 대신 중국어를 선택했어요. 그게 홍콩 가서 생활하는 데 도움이 됐지요. 한국과 홍콩의 합작영화 <순간은 영원히>를 찍을 때 오픈세트에서도 촬영하기 힘든 액션장면을 실제 홍콩 거리에서 찍었어요. 쇼브라더스 대표인 란란쇼가 그걸 보고 깜짝 놀란 모양이에요. 직접 전화를 걸어 당장 와달라고 부탁하더군요.

무협영화의 대가인 후진취안(胡金銓) 감독이 정 감독님의 영향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정 = 그분이 저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과찬이지요. 쇼브라더스에는 액션감독은 없고 무협감독만 있었는데 란란쇼가 제 영화 <천면마녀>를 연구해보라고 지시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후진취안 감독의 영화에는 시가 있고 철학이 있어 제가 좋아하고 친분도 깊었지요. 제가 무협영화를 찍을 때 도움도 많이 받았습니다.

<장군의 아들>을 보니 템포와 리듬 면에서 정 감독님의 영화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임 = 그럴 수밖에 없지요. 그 문하에서 액션과 사극을 배웠는데 제 영화의 뿌리가 닿아 있는 것은 당연하지요.

젊은 감독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은.

▲정 = 우리가 한국에서 영화를 만들 때는 참으로 피눈물나게 생활했어요. 지금의 여건에서는 본인의 재량에 따라 얼마든지 뻗어갈 수 있습니다. 좁은 한국시장만 바라볼 게 아니라 세계시장을 겨냥한 영화를 만들어주기를 기대합니다.

임 감독님이 정 감독님께 바라는 바를 말씀해주시지요.

▲임 = 거기서 늘 영화를 생각하시며 사신다니까 한번쯤 왕년의 솜씨를 다시 보고 싶군요. 젊었을 때와 나이 들었을 때의 감각과 깊이는 확실히 차이가 납니다. 저도 60년대 찍은 영화와 90년대 찍은 영화가 많이 달라요. 정감독님이 지금 연출을 하시면 새로운 면모를 보일 수 있을 겁니다.

정 감독님께서는 어떤 생각이신가요.

▲정= 조용히 지냈는데 부산영화제에서 파문을 일으켜 다시 해보고 싶다는 바람이 들어가 있어요. 그런데 어젯밤에 곰곰 생각해보니 두려운 생각이 들더라구요. 아무래도 겁이 나서 못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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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