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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lk] 찰나의 행복,곽경택 감독
2003-10-08

부산에서 자라나고 이곳의 기억을 퍼올린 영화를 만들어 왔던 나에게 부산과 부산영화제는 당연히 특별할 수 밖에 없다. 이 영화제가 처음 옹알이를 시작했던 1회 때, 나 역시 단편 <영창이야기>를 안고 부산을 찾았고, 다음해인 97년 첫 장편 <억수탕>을 부산영화제에 상영했으니 영화제의 역사와 나의 감독으로의 역사가 비슷한 이력을 가진 셈이다.

뉴욕대에서 유학을 끝내고 처음 한국에서 데뷔를 준비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고 이럭저럭 영화가 제작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이 판에 아는 사람도 없었다. 결국 충무로 스탭이 아닌 미경험의 ‘초짜’ 스탭들을 모아놓고 초저예산으로 힘들게 영화를 만들게 되었을 때의 어려움이란 지금 돌이켜보아도 감히 실감할 수 없을 정도다. 본 촬영은 겨우 18일이었고, 열기가 퍽퍽 오르는 더운 목욕탕에서 배우고 스탭이고 할 것 없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 땀의 소산물을 완성해서 내 고향에서, 그것도 수영만 요트경기장의 상공에 쏜다고 생각하니 어찌나 뿌듯하고 설레던지. 게다가 어떻게 알았는지 고등학교 은사님들과 친구들이 모두 영화를 보러와 주었을 때의 고마움은 사실 몇백만의 관객들의 지지보다 든든한 것이었다. 인사를 위해 무대위에 스탭과 서 있었었는데 그때는 어쩐지 내가 저 하늘위에서 무대 위의 스탭들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억수탕>은 영화 전체가 부산사투리로 이루어졌는데, 물론 <친구>가 개봉되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은 지금이야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경상도 사투리로 나온 영화가 처음이었으니 관객들에겐 이 신인감독이 당연히 엉뚱하게 비춰졌을 것이다. 부산관객들은 자신들이 일상에서 쓰는 말이 영화에 나오니까 좋아하면서도 생소해 했던 기억이 난다. 어떤 분들은 “저렇게 사투리로 만들어서 서울사람들이 우찌 보겠노”하며 거꾸로 걱정을 늘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제 이후 이 영화는 부산에서 제대로 상영도 못했다. 극장주인에게 개인적으로 부탁해서 일주일 걸은 게 고작이었다. 거의 문을 닫은 상태였던 제작사는 홍보에 아무런 의지도 없었고 부산에서 깨진 만큼 서울에서도 깨졌다. 그렇게 부산영화제에서 <억수탕>이 상영되던 그 2시간은 사실 내 데뷔작의 제작부터 상영까지 가장 기뻤고 벅찼던 ‘유일한’ 순간으로 기억 속에 박혀있다. 아마도 그 지옥같은 과정 속의 이 찰나의 행복이 나에게 <친구>를 만들 수 있는 거대한 원동력으로 작용한 게 아닐까. 곽경택/ <친구> <똥개>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