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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것처럼 대해야 할 남의 음악,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월드 뮤직은 없다’가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왜 하필 ‘세계 음악’일 필요가 있을까. 어떻게 세계 각 지역의 독특한 자기표현 수단으로서의 개별 ‘폴크로리크’ 음악이 ‘월드 뮤직’이라는 개념으로 묶일 수 있을까.

그렇게 된 건 우선적으로 서양의 제국주의적 인류학의 산물이다. <라디오 프랑스>나 의 ‘오디오 자료’ 서가에는 각국의 민속음악들이 이잡듯 수집되어 있다. 그 방대한 규모의 ‘디스코테크’는 살아 있는 음악의 보고 같아 보인다. 그러나 정작 그곳은 표본들의 공동묘지다. 그 음악들은 등에 핀이 꽂히고 방부처리된 채 액자 안에 영원히 전시되어 있는, 파브르의 곤충들과 다를 바 없다. 서구의 근대적 기획은 그렇게 런던, 파리 등의 핵을 중심으로 전세계를 줄세우는 일을 했다. 모더니즘은 시간적으로 가장 앞선 서양의 심장 속에 ‘세계’라는 과거를 전시한다. 미래의 인공낙원에 그들이 먼저 도달해야 하기 때문에 시작된 그 줄세우기의 일환으로 월드 뮤직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 것은 물론이다.

또 하나, 이 개념은 어차피 장르로 범주화시키고 스탠더드를 만들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 ‘팝 시장’의 개념 정립의 소산이다. 한마디로, 타워 레코드 같은 대형 매장의 한켠에 칸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붙일 이름을 찾다가 ‘월드 뮤직’이라는 이름이 나온 것일 터. 영미나 프랑스, 독일 같은 나라는 자기들 나라 이외에는 다 ‘세계’라고 축약하는 버릇이 있기도 하다. 그 이름 붙이기는, 백과사전의 대부분을 차지해야 하는 항목이 단 항목으로 축소되고 한 항목일 수도 있는 음악이 대부분의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는 격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이렇게 기획된 월드 뮤직의 범주 안에 전세계의 민중이 수천년에 걸쳐 흙과 땅, 바람과 물, 하늘과 별과 교감하고 서로 사랑하고 싸우고 죽이고 살리고 미워하며 살아온 소중한 결과물들이 들어 있다. 이번에 C&L뮤직에서 발매된 넉장짜리 <세계의 민속음악> 박스 세트는 그런 의미에서 새롭게 음미되어야 할 기획이라 할 수 있다. 이 음악들은 영국의 저명한 민속음악 레이블인 ‘아크’사의 녹음들을 모은 일종의 샘플러 성격도 아울러 지니고 있다. 아크사는 특히 유럽과 아랍권 민속음악의 훌륭한 녹음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세계적인 월드 뮤직 레이블이다. 최근의 노력을 통해 이 음반사는 카자흐스탄 같은 중앙아시아나 아메리카 원주민의 고유한 소리들을 수록한 녹음의 레퍼토리도 많이 늘려나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세트는 방대한 세계의 민속음악을 넉장의 CD에 집약시키는 힘든 작업을 비교적 충실하고도 효과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계의 민속음악을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의 네 대륙으로 분류하여 유럽 21곡, 아프리카 17곡, 아시아 16곡, 그리고 아메리카 18곡 등 모두 72곡을 선보이고 있다. 아일랜드, 스페인, 아르메니아, 집시, 유대인, 이집트, 부시맨, 샤카 줄루, 크레올, 중국, 일본, 티베트, 몽고, 시베리아, 안데스, 브라질 등 전세계의 민중이 어떻게, 어떤 느낌으로 소리들을 다루고 소리를 내는지 일별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한다. 게다가 거의 소책자를 방불케 하는 비교적 충실한 소개의 글들을 함께 접함으로써 이 음악들의 출처에 대한 나름의 지식을 더할 수 있는 것도 이 음반들의 미덕이다. 물론 아크 레이블의 성격상 아프리카의 음악을 다룰 때에도 반 이상이 북아프리카, 즉 아랍권 음악으로 채워져 있다거나 아메리카쪽의 레퍼토리가 조금 부족한 인상이 드는 점은 어쩔 수 없지만, 이만큼 개괄적인 세계 민속음악 소개음반이 대중적으로 선보인 일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런 약점들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다.

이런 녹음들의 일부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해당 지역보다 1세계의 도서관에 더 많은 자료들이 있는 게 사실이다. 괜히 화가 나기도 하지만, 그러나 바로 이때, 그들이 모아놓은 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서양 사람들은 남의 것처럼 듣지만 우리는 바로 그 ‘남의 것’으로 범주화된 타자의 일부다. 우리가 그들의 오리엔탈리즘을 답습한다는 것은 참 우스운 일이다. 서양의 박물학은 남의 것처럼 이 음악들을 범주화시키고 수집했지만 우리는 ‘우리 것 대하듯’ 그 음악들을 대해야 한다. 월드 뮤직이라는 개념은 서양의 관점에서 극명하게 제시되는 ‘타자성’을 대표하는 개념이지만 우리에게는 일종의 ‘자기동일성’의 일부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이 거대한 박물학의 보고를 외면하는 것이 단견인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음악들은 절대로 ‘남의 음악’이 아니다. 조금 과장된 표현일지 모르나 이 음악들은 각국 민중의 서로의 거울이다. 땅에 따라 꽃 다르고 꽃이름 다르듯 각 문화집단의 길가에, 왕궁의 정원에, 광장에 핀 꽃들이다. 이 꽃들을 바라보는 관점은, 다시 말해 월드 뮤직을 듣는 올바른 태도는, 우리가 신중현 같은 우리 로큰롤 명인의 음악을 대할 때와 기본적으로 같아야 한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