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이 자신을 믿어주는 힘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시기가, 인생에는 있다고 생각한다. 지쳐서 한 발자국도 내디딜 수 없을 때, 자신에 대한 믿음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자신을 믿어주는 누군가의 마음이 있다면 살아낼 수 있다.
“깨닫지 못할지라도, 누군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답니다”는 부제가 붙은 요네쇼 마야의 <learn to love>는 러닝타임 3분의 단편이다. 1985년부터 애니메이션 작업을 해온 요네쇼 마야의 표현양식은 서서히 구상에서 추상으로 바뀌었다.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컷아웃애니메이션, 클레이애니메이션, 3D애니메이션, 퍼핏애니메이션 등 온갖 기법을 넘나들던 작가는 이윽고 추상적인 표현양식을 선택했다. 캐릭터와 스토리, 대사에 의존하는 대신 문양과 색, 운동을 통해 이미지를 보여준다. 여기에 작가가 컴퓨터로 직접 만들어낸 단순한 음향과 일본인에게는 생경한 소리로 들리는 타국의 언어가 첨가된다. 하나의 화면에서 다양한 프레임을 보여주는 효과를 내기 위해 작은 스케치북을 여러 개 배열한 점도 눈에 띈다.
안시페스티벌에서 입선한 1998년작 <introspection>부터 나타난 작가의 새로운 시도는 내용에서도 달라지는데, 코믹하고 귀여운 캐릭터가 등장했던 과거에서 완전히 탈피해 인간의 내면에 치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learn to love> 역시 이런 작업선상에 있다. 보이는 것은 하얀 스케치북에 파스텔톤의 문양. 원에서 세모로, 네모, 줄로 변하는 운동 이미지는 사랑을 묘사하고 있다.
서로 다른 삶을 살던 이들 사이에서 사랑이 싹트고, 행복하지만 그것도 잠시, 질투하고, 싸우고, 망설인다. 온갖 감정의 격랑이 지나간 뒤 마침내 하나가 된다. 하나가 되는 순간 우주는 변하고 만물은 생동하며 주변으로 사랑이 전해진다. 갖가지 감정이 파스텔톤과 단순한 문양을 통해 표현되는 점이 놀랍다. 운동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소리다. 작가가 컴퓨터로 직접 만들어낸 소리와 더불어, 한국어와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가 번갈아 들린다. “사랑해.” “널 만나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 여러 언어의 울림이 여운을 준다. 마침내 마음과 마음은 이어지고 새하얀 도화지를 마지막으로 작품은 끝난다.
하나의 화면이 여러 개의 작은 스케치북으로 구성된 덕분에, 짧은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것을 담아내고 있다. 작가의 경험이 녹아 있다는 <learn to love>는 꾸밈도 장식도 없이, 마음을 보여준다. 그 마음을 보여주는 표현양식에 선입견이 들어갈 여지가 없어서 관객은 자신의 느낌을 투시하게 된다. 그게 작가의 의도와 달라도 좋고, 같아도 좋다. 시인 류시화가 “반쯤 열린 문”이라고 표현한 하이쿠의 세계와도 통한다.
요네쇼 마야는 교토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작가다. 1998년 영국 유학을 마친 그는 지금까지의 작업세계를 버리고, 기본에 충실한 작업에 치중해왔다. 그를 에든버러 예술대와 영국왕립예술대학에서 공부하도록 지원한 것은 교토부다. 수도 도쿄를 중심으로 문화가 발달하고 있는 것은 일본도 마찬가지지만, 과거 일본의 중심이었다는 간사이 지방의 자존심은 문화정책적인 측면에서도 균형을 끌어내고 있다. 가부키가 먼저 연상되는 도시 교토에서 꾸준히 애니메이션 작가에 대한 지원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learn to love>는 브레즈베인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자그레브페스티벌, 오타와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등에서 소개된 바 있다. 김일림/ 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 illim@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