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이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이유는?
건달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보고, 도망노예의 미학 사무라이를 떠올리다
어느 날 당신이 노예로 팔려간다고 치자. 당신의 주인이 된 자는 포악한 지배자로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당신은 주인의 권력을 전복시킬 만한 힘이 없다. 이럴 경우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보통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알고 있다. 주인 앞에서는 아부하고 돌아서기 무섭게 노예끼리 모여서 뒷담화를 하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일상의 반복. 하지만, 이 이중적 태도를 몸에 밴 생활의 지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비열한 술수로 느끼는 자의식 강한 노예가 있다면 어떡할 것인가. 이중적 태도에 대한 자기검열의 고통을 겪지 않으면서 노예의 자리에서 온전한 삶을 살 수는 없는 것인가.
이 난해한 문제를 인상적으로 해결한 두 종류의 인물이 있다. 흑인 노예 ‘엉클 톰’은 엄연히 존재하는 주인과 노예의 경계를 휴머니즘이란 지우개로 지워버렸다. 주인과 나를 구별하지 않기 위해, 주인에게 굴종 아닌 충성을 바치기 위해. 말하자면, 주인 앞에서 아부하는 자신이 싫어서 굴종 자체를 의식할 수 없도록 내면연기를 한 것이다. 엉클 톰의 전략은 정치적 통증을 없애려고 정치적 신경을 죽여버린 다음, 그 무감각을 정서적 포용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주인의 시선이 불편해서 영혼까지 내어준 톰과 달리 ‘도망노예’는 시선 자체를 거부한다. ‘도망노예’는 주인의 시선을 피해 달아난 대가로 주인의 감시가 미치는 속세에 거주하지 못하고 절대고독의 자리에 머문다. 깊은 산속이나 절간 같은 곳에서 도망노예는 자신을 고독 속에 유폐시킨 주인을 증오하며, 주인을 증오할수록 ‘주인은 못하고 자신은 할 수 있는 것’ 즉 비교우위에 집착한다. 그것이 주인에 대한 최고의 보복인 동시에 고립된 절대자유의 최대 기회비용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도망노예가 찾아낸 것은 권력에 눈먼 주인의 눈에는 절대 보이지 않는 것, 바로 아름다움이다. 칼로 세상을 베어내면서 권력을 유지하는 주인을 의식하는 도망노예는 아름다움을 후벼파면서 주인과 경쟁한다. 마약 같은 아름다움에 몰입하기 위해 검술 수련을 하는 사무라이의 자세를 취해야 하는 것. 그것이 도망노예의 운명이다.
흔히 일본 미학을 도망노예의 미학이라고 한다. 한국은 정치권력을 가진 사대부들이 시도 쓰고 그림도 그리면서 나름의 미학을 발전시켜왔지만, 일본은 사무라이의 통치하에서 정치권력과는 무관한 승려들이 미학의 담당자들이었다. 사회적 현실에 개입할 수도, 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일본의 미학은 자연스럽게 개인을 파고들었다. 또, 사회적 계몽보다 개인적 감상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형식화에 편집증적 집착을 보인다. 한마디로 일본 미학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은유는 개인의 육체와 내면에 대한 해부학적 열정을 종교적 자세로 추구한다는 것이다. 순도 100%의 아름다움을 도려내기 위해 검술 수련을 하는 사무라이의 눈에 ‘사회성 짙은’이란 말은 ‘순도가 떨어지는’과 동의어이다. 이들에게 ‘사회성 짙은’은 주인의 언어인 지식권력의 효율적 유통을 위해 아름다움을 포장지로 내다파는 것을 말한다.
김기덕의 영화를 보면 자주 그가 칼로 뭔가 베고 싶어하는 사무라이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그가 도려내고 싶은 것은 순도 100%의 아름다움이 아니다. 그는 인간의 내면에 기름때처럼 달라붙어 있는 순도 100%의 악을 도려내고 싶어한다. 그래서 언제나 악을 찾기 위해 탐침을 육체 속으로 들이밀어야 하고 악을 긁어내기 위해 외과의처럼 살을 찢어야 한다. 이건 종교적 자세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욕망을 미학적 자세로 추구하는 것이다. 그의 영화에 숱하게 등장하는 시적 상징은 그 아름다운 영상과 색채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단 하나의 기의, 즉 벌거벗은 인간존재의 조건을 가리킬 뿐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그 아름다운 세트 속에서도 ‘섹스가 명약’인 여자와 ‘폭력이 일상’인 남자가 발정기에 만나 결국은 살인의 악연을 만든다. <나쁜 남자>나 <해안선>보다 ‘외과적 시술’은 줄었지만, 인간 내면의 악에 대한 진단은 여전하다. 악을 제거하는 방법이 외과적 수술에서 종교적 화해로 나아간 게 전작과 다른 점이지만 종교적 화해로 나아가는 과정은 여전히 외과적이다. 분노를 삭이기 위해 반야심경을 새긴 나무 바닥을 칼로 후벼파고, 수행을 위해 황비홍처럼 권법체조를 하고, 한겨울에 웃통을 벗은 채 특공대처럼 맷돌을 지고 산으로 올라가는 모습은 승려의 분장을 한 사무라이 같다. 그가 베고 싶은 것은 악일까 적일까? 나는 그가 미학적 순교를 꿈꾸는 확신에 찬 도망노예인지, 복권을 꿈꾸는 잠시 귀양온 교주인지 종종 헷갈린다. 그래서 다음 영화를 또 봐야 한다.남재일/ 고려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