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인생에도 컴퓨터처럼 리세트 버튼이 있다면 그냥 콕 눌러버릴 텐데….’
만화 <크레이지 군단>의 소년들이 내뱉는 말이다. 마사루와 쌍벽을 이루는 어쩐지 더 어둡고 성장에 대해 다소 잔인한 스케치를 변태적인 그림에 덧입힌 훌륭한 만화다. 같이 작업하는 친구는 이 만화의 어두운 유머의 추종자. 난 마사루의 밝은 무책임론 추종자. 우린 이렇게 변태 팀워크로 계속… 논다. 우린 지난해까지 부산에 갔었는데 올해는 내려가지 않는다. 이유? 이유 따윈 없다. 그냥 안 내려간다(돈… 크아! 돈이 웬수다). 그런데 내려가지 않으면서도 왜 보고 싶은 영화에 동그라미를 쳤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어쩐지 <크레이지 군단>이 생각나는 영화가 한편 있어서다.
바로 이 영화. <후나키를 기다리며>. 내용으로 말하자면 영화하는 어벙한 애들이 지방에 내려가서 제작비를 가지고 내려오는 ‘후나키’를 기다리며 벌어지는 일이라는데…. 시골 마을 사람들은 얘네들이 영화 찍는다고 하니까 포르노영화 같은 것 찍느냐고 물어본다. 그런데 얘네들 대답 왈. ‘아니다. 포르노영화 아니다.’ 그리고 조금 뒤 ‘그리고 난 숫총각이다’라고 대답한단다. 쓸데없는 대답을 하는 이 대목…. 크하하 갑자기 범상치 않음을 느끼며 보고 싶어진다. 이 왕소심하고, 어떻게 보일까 끊임없이 두려워하며(사실 아무도 신경 안 쓴다), 좋아하는 분야에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루저 캐릭터가 나오는 <후나키를 기다리며>란 영화를 보고 싶은데 어쩔 수 없이 구시렁대며 동그라미만 쳐놓고 만다. 인물들이 미노루 후루야(<크레이지 군단> 작가) 같을 것 같은 기대감과 그 엉뚱한 캐릭터들에게 마음을 다 뺏길 거 같기도 하면서 말이다. 이 영화 역시 일본 자주영화 계열이라 일본에서도 마케팅비의 살인적인 부담으로 개봉이 될지 안 될지 모르는 독립영화들 중 하나다.
이런 영화들을 부산에선 극장에서 볼 수 있으니 얼마나 행운인가…. 7번째에서 8번째 맞는 부산영화제라… 부산… 사실 난 어렸을 적 부산에서 자랐다. 부산은 지금은 사라진 TBC(일본의 TBS가 아니랍니다)가 일주일씩 늦게 방영되면서 오히려 NHK가 더 선명하게 나오던 도시이다. 나의 유년기는 오히려 NHK의 <수요로드쇼>를 부모님 몰래몰래 보며 두근거리며 자랐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잠자리표(톰보) 연필의 머리가 어지러워질 것 같은 휘발성의 맵싸한 냄새를 좋아했고 펜탈 샤프의 미끄러지는 촉감을 좋아했다. 지금도 부산영화제에 가면 영화 보는 틈틈이 나의 유년기 시절 동네를 돌아다니거나 초등학교의 마룻바닥과 그 당시도 하늘을 찌르던 히말라야시다나무를 보러 가곤 했다.
때로는 보수동 헌책방 골목에서 맞춤법 개정 전의 동화책을 찾아보곤 올라오고 했었다. 부산영화제가 처음 열리던 당시 일본영화가 잘 소개 안 되던 그 시절, 일본영화를 정식으로 자막이 쳐진 상태의 스크린으로 보는 설렘이란…. 게다가 최근의 작품을 그것도 풋풋한 감독들의 영화들을 만나는 기회는 부산만이 가지는 특권이었다. 부산영화제의 기쁨은 나에겐 가깝고도 먼 나라일 수 있는 그리고 알게 모르게 우리의 유년기 문화를 잠식했던 그 일본이란 나라의 젊은 영화들을 만나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때부터 알게 된 감독이 바로 사부이다. 아마도 부산에 내려가선 꼭 사부의 작품을 챙겨본 것 같다(아니면 전주에서도 꼭 찾아서 보곤 했다). 생각해보면 1996년 <탄환러너>에서부터 지난해 <행복의 종>까지 1년에 한편씩 꼭 들고 찾아오던 사부 감독의 영화를 챙겨보면서 어느덧 사부는 8번째 작품을, 나는 어영부영 8년을 보내게 된 것이다.
지난해 <행복의 종>을 보고 나올 땐 마치 ‘'아 사부의 영화와 난 함께 늙는구나’란 생각에 씁쓸했는데 올해는 어떨까? 이런 생각에 아예 눈길을 <후나키를 기다리며>를 만든 새 감독으로 옮겨버린 것이다. 쿠쿠쿠 이렇게 난 얍삽하다. 쳇… 보지는 않았지만 사부의 신작 재미있겠지…. 일본에서도 개봉 안 하고 막바로 DVD로 나간다는데 그것을 극장에서 보는 행운을 부산에서 사람들은 맞는 것이다. 사부 감독의 <포스트맨 블루스>가 우리나라에선 영화제말고도 극장에서 개봉했었다. 다양한 캐릭터, 그들의 좌충우돌…. 빈틈없는 코미디에 줄곧 내달리는 그의 영화. 하지만 그는 영화 마지막에 항상 공권력에 대한 강한 불신을 조금 어두운 색조로 보여주곤 했었다…. 그 사부가 이제는 일본의 아이돌 스타와 함께 찍은 예의 그 내달리는 영화와 루저의 심장 야마시다 노부히로의 신작이 함께하는 부산영화제. 마이너리티의 세계에도 60년대생 감독과 함께 이제 70년대생 감독들이 슬그머니 윤곽을 드러낸다. 좀더 선배보다 패배적이고 회피하는 느낌이지만 그 패배감이 먹히는 이유는 세상이 갈수록 암울해지는 것 때문일까? 부산에 내려가는 사람들. 서울의 많은 사람들 대신 이 영화들 잘 보고 올라오세요. 우린 서울에서 어제와 똑같은 오늘을 살고 있을 테니….김정영/ 영화제작소 청년 회원· 프로듀서 sicksadworld@orgi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