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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김동호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2003-10-02

`시네마 부산' 명성 구축한 `만년 청년', "젊은이들과 일하다 보면 저절로 젊어져요"

항구도시 부산은 2일 시네마 축제의 막이 오르면서 올해로 여덟 번째 영상의 향연에 빠져든다. 파도소리와 별빛으로 채색된 스크린을 해변의 가을하늘에 걸고 있는 김동호(金東虎.66)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의 손놀림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능숙하고 날렵하다는 데 이견을 달 사람은 없다.

`시네마 부산'의 성가(聲價)는 칠순을 앞둔 나이에도 만년 청년으로 통하는 서글서글한 인상의 김 위원장의 열정 덕택에 본격적으로 빛을 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직도 할 일이 많아요. 부산국제영화제가 세계 유수의 영화제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습니다."

8년째 집행위원장으로 `장기 독재'하고 있는 김 위원장은 이날 근황을 묻는 안부전화에 초심(初心)을 잃지 않겠다는 듯 스타트 라인에 서 있는 주자의 심경을 내비치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부산영화제 전용공간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영화제 전용관을 확보해야 영화제 일정이 오락가락 하지 않도록 개막식 날짜를 정할 수 있어 국제무대에서 신망도를 높일 수 있어요."

"전용극장 확보하는 것 외에도 장기발전 방안 마련과 예산확보, 집행위원회의 재단법인화 등도 남아 있는 과제들입니다. 이런 일들을 풀어가려면 당분간은 더 `독재'를 해야겠죠."

1996년 첫 출발은 단촐했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명성이 쌓여 신생영화제의 한계를 벗어던진 지 벌써 오래다.

"세계 영화인들 사이에 `부산에 반드시 가봐야 한다'는 인식이 퍼져 있어요. 작년에 칸.베를린.베니스 3대 국제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이 부산을 찾은 것은 세계 영화제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어요. 올해에도 40명 이상의 각종 영화제 집행위원장과 프로그래머들이 옵니다."

부산영화제를 국제영화제 반열에 올려놓은 성공신화로 온갖 찬사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그는 그러나 우리의 전통 영화문법을 계승하고 있거나 예술적 기교가 뛰어난 베테랑 감독도, 충무로에서 잔뼈가 굵은 토종 영화인도 아니다.

작년에 17차례, 올해 13차례 국제영화제 심사위원 등의 자격으로 해외를 다녀왔을 정도로 국제무대에서 인정받고 있지만 말년에 영화와 인연을 맺기 전까지는 `잘 나가는' 문화부처 공무원이었다.

서울 재동초등학교-경기중.고-서울대법대를 거친 정통 `KS'맨으로, 5.16쿠데타가 터졌던 1961년 24세에 문화공보부 말단 주사보로 공직에 첫발을 내디딘 이래 고속승진을 거듭하다 1980년 요직인 기획관리실장 자리에 올랐다.

그 후 8년간 최장수 기획관리실장으로 재직하면서 이광표(李光杓).이진희(李振羲).이원홍(李元洪).이웅희(李雄熙).정한모(鄭漢模) 씨 등 다섯 장관을 모신 뒤 88년 영화진흥공사 사장에 취임했다. 영화와의 운명적인 만남은 그렇게 이뤄졌다.

그러나 당시 영화진흥공사 사장에 영화의 문외한인 비전문가 관료출신이 취임한다는 이유를 들어 영화감독협회가 이른바 낙하산 인사 반대성명을 발표했단다. "그때부터 영화인들과 매일 만나 현안에 대해 토론하고 매년 100편 이상의 영화를 보면서 영화공부를 했어요."

부산영화제를 성공적으로 가꿔온 오늘날의 그의 열정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짐작할 수 있는 단초가 되는 대목이다. 경기도 남양주에 45만 평 규모로 조성된 종합촬영소가 그의 `치적'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다.

이어 예술의전당 사장, 문화체육부 차관, 공연윤리위원장을 거쳐 공직에서 물러나 있던 1995년 김지석 당시 부산문화예술대 교수, 이용관 경성대 교수(현 중앙대 교수), 전양준 영화평론가 등 세 명의 골수 영화인이 찾아와 `부산국제영화제'를 만들자고 제안한 것이 영화제의 태동이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그해 8월께 세 사람이 항구도시인 부산이 영화제의 최적임지라며 집행위원장을 맡아달라고 해서 고민끝에 흔쾌히 수락을 하고 곧바로 영화제 출범작업에 나섰습니다."

"영화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끝에 부산시 지원, 각종 협찬금으로 22억원을 확보해 영화제의 닻을 올렸다"는 그는 "처음 막이 오른 영화제여서 큰 성공을 기대하지 않았으나 굉장히 많은 관객이 몰려와 가슴이 벅찼다"면서 1996년 9월13일 제1회 영화제 개막당시의 감흥을 잊지 못했다.

당시 27개국 170편의 영화 리스트를 들고 출발한 영화제는 불과 8년만에 61개국 244편의 영화를 상영하는 성공을 거뒀고, 북한 영화 7편도 처음 선보일 기회를 맞았을 정도로 명실상부한 아시아 대표영화제로서의 위상을 굳혔다.

"3회때부터 도입한 부산프로모션플랜(PPP)은 부산영화제 성장의 또다른 원동력이었습니다. 장래가 촉망되는 유망한 아시아 감독들과 배급자, 투자자를 이어주는 제도입니다. 지금까지 기획단계의 작품이 거래된데 반해 이번에는 완성영화들도 거래되는 필름 마켓으로 전환됩니다."

젊은이들도 너끈히 `해치우는' 술 실력, 폭탄주 실력은 김 위원장한테 따라 다니는 또다른 `명성'이다. 해운대 해변에 빽빽이 늘어선 포장마차촌이 부산영화제의 뒤풀이장으로 자리매김한 것도 그의 공이다.

밤새도록 그 많은 포장마차를 일일이 순회하며 폭탄주를 곁들여 영화를 논하는 김 위원장 덕분에 영화제 기간 포장마차촌은 `손님없어 걱정할 일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언젠가 포장마차가 꽉차 빈자리가 없는 걸 확인한 김 위원장이 길 바닥에 신문지 깔고 털썩 앉아 한 순배 돌리는 광경을 본 외국의 영화인들이 `스트리트 파티'(street party)라고 이름붙인 적이 있단다.

아무리 늦도록 술자리가 이어져도 그의 기상시간은 새벽 5시 이전으로 고정돼 있다. "그 시간에 일어나 조깅 등 운동을 한 뒤 냉온탕을 오가는 `냉온욕'을 거르지 않는다"는 그는 "지난 30년간 지켜온 나만의 건강유지 비결"이라고 전했다.

극장이 몰려 있는 부산중구 남포동과 각종 행사가 많이 열리는 해운대를 오가야 하는 위원장 처지이나 교통정체로 이동에 어려움을 겪게 되자 퀵서비스 택배 오토바이를 불러 `배달'을 부탁하는 꾀를 낸 것도 영화인들 사이에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이런 숱한 일화를 `김동호'란 집행위원장의 이름 석자와 함께 한국 영화사에 남기고, 먼훗날의 화려한 명성을 기약하며 또 한 해의 연륜을 쌓아가고 있다.

-집행위원장의 임기는 몇년입니까.

=영화제 조직위원장이 위촉하는데 정해진 임기는 없어요. 영화제 창설 이래 내리 8년째 하고 있지만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국내에만도 부천판타스틱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광주국제영화제 등이 열립니다. 영화제가 홍수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영화제가 많으면 지역 주민들에게 다양한 영상 체험 기회를 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일반극장에서는 볼 수 없는 영화를 영화제 기간에 접할 수 있도록 한다는 이점도 있잖아요.

-부산국제영화제가 다른 영화제와 어떻게 차별화되나요.

=아시아 영화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것이 부산영화제의 특징으로 꼽힙니다. 아시아의 새로운 영화를 발견하고 아시아의 영화인들을 발굴해 국제무대에 널리 알리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어요.

-전용관 문제는 진척이 있는지요.

=영화관이 손님들로 붐비는 추석대목을 피해야 극장을 빌릴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음력으로 날짜가 왔다갔다 하는 추석 3주 후에 부산영화제가 열리다 보니 국제영화인 초청 등에 어려움이 많을 뿐 아니라 국제적인 신망도 떨어집니다. 전용극장이 절실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현재 `시네포트'(cineport)란 전용관 설계비 명목으로 40억원의 정부예산이 책정돼 국회심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예산만 확보되면 내년부터 설계단계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말년에 젊게 사시는 비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영화제는 젊은이들의 축제 아닙니까. 관객의 90% 가량이 10-20대 젊은이들인걸요. 젊은 사람들과 어울려 함께 일하면서 젊은이들과 동화되기 때문이겠죠.

-시중에는 45세 정년이란 `사오정', 56세에 회사다니면 도둑이란 뜻의 `오륙도'란 말이 유행입니다. 칠순을 앞두고도 정년 걱정없이 활동하시는군요.

=정년퇴임하고 다들 은퇴한 공무원 동기생들은 왕성하게 활동하는 저를 부러워 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문화부처 공무원으로 절반, 영화인으로 절반의 삶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어요. 요즘은 과거 공직생활 때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일할 수 있어 더 큰 보람을 느끼고 재미있습니다. 나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활발하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비결이라면 비결이겠죠.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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