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재미있는 만화 없어요?” 술자리에서 만화 칼럼니스트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건, 가수에게 반주없이 노래하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선의를 가지고 대답을 해주려고 해도, 상대방과 안면도 별로 없고 그쪽의 취향도 잘 모를 땐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럴 땐 ‘평소 즐겨보는 만화’가 뭔지 물어본다. 그러면 다섯명 중 두명은 이렇게 대답한다. “글쎄요. 요새는 만화 본 적 없는데.” 더 난감하다. 그러나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TV는 보시죠? 즐겨보는 채널이 뭐예요?” 그래서 MBC-ESPN과 스타 스포츠를 즐겨보면 야구나 축구만화를, 캐치온과 OCN을 즐겨보면 영화 같은 탄탄한 스토리의 만화를, 바둑 TV와 온게임넷을 즐겨보면 <고스트 바둑왕>이나 <타짜> 같은 작품을 소개한다. 그런데 곤란한 것은 디스커버리와 내쇼널지오그래픽의 애청자들이다. 이런 고고한 다큐멘터리 팬들은 허무맹랑한 만화와는 분명한 거리를 두고 있는 게 사실. 그러나 그럴수록 제대로 즐길 만한 만화를 소개해줘 만화 독자로 끌어들여야 하는 게 아닌가? 이런 내 고민을 해결해줄 만화들이 나왔다. 그것도 한꺼번에 두종이다.
이번에 서울문화사에서 함께 나온 도코로 주조의 <디노디노>와 오가와 다카아키의 <딥 Deep>은 문자 그대로 ‘자연다큐멘터리만화’다. 한쪽은 저 옛날 원시 우림의 공룡 세계, 다른 한쪽은 깊고 넓은 바다 속 생물의 세계를 정교한 필치로 그려나가고 있다. 세심한 고증과 정확한 묘사는 TV다큐멘터리 속에서 슬쩍슬쩍 지나쳐버릴 장면들을 오래도록 관찰하게 해준다. 한눈에 들어오는 그림 설명과 정확한 근거에서 따온 글 설명은 만화가 지닌 복합적이면서도 명료한 커뮤니케이션의 힘을 느끼게 해준다. 그러나 자연다큐멘터리 팬들에게 이 만화들을 자신있게 내보일 수 있는 이유는 그러한 정확성과 사실성 때문만은 아니다. 만화가 지닌 픽션으로서의 즐거움이 거기에 적절히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두 작품 모두 공룡의 여러 종, 향유고래, 바다 이구아나 등의 생명체를 가급적 사실에 가깝게 그리지만 그들에게 인격적인 요소를 집어넣어 그들의 삶과 사랑과 죽음을 좀더 생동감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디노디노>에서 삼첩기 후기, 새로운 지배자인 공룡이 등장하는 상황은 한 마리의 대형 파충류인 포스토스쿠스가 암컷을 찾아 사막을 건너가는 모험의 과정으로 그려진다. 그는 구사일생의 위기를 거쳐 오아시스를 발견하지만 자기 숲의 주민들이 앙상한 뼈로 사라져버린 사실을 발견한다. 종의 보존은 더이상 불가능해진 상황, 그는 자신의 숲이 생태계의 타임캡슐처럼 남아 있지만 곧 종말에 처해질 것임을 안다. 그러나 그는 고향의 숲으로 돌아와 최후의 항전을 준비한다. 전 시대 지상의 왕으로서 과감히 ‘시대에 역행’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역전적인 시점은 공룡의 등장이라는 사실을 좀더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모든 이야기들이 분명한 개연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 에피소드들이 독자들에게 ‘교훈’과 ‘흥미’를 북돋우려는 이유로 인간적인 도덕을 지나치게 앞세우기도 한다. <딥>에서 딱총새우와 공생줄망둑이 우스꽝스럽지만 끈질긴 우정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공생이라는 실제의 관계에 기초해 있지만, <디노디노>에서 티라노사우루스가 트리케라톱스의 새끼를 자신의 자식처럼 받아들이는 모정은 지나친 허구적 상상의 산물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러나 독특한 사실성의 자연만화로 익히 명성을 떨친 바 있는 <곤>의 자아도취적인 성격과 같은 ‘문제적인 도덕’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어린 독자와 부모들이 용납가능한 보수적인 도덕으로 포장되어 있고, 그런 면에서 학습만화의 범주에서도 훌륭히 통용될 수 있다고 보인다.
몇 가지 면에서 두 작품은 표현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점묘를 즐겨 쓰며 부드러운 톤을 느끼게 해주는 <디노디노>와 스크린톤을 능숙하게 사용해 깔끔한 입체형을 만들어내는 <딥>의 외형적 차이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좀더 분명한 차이는 화법에서 드러난다. <딥>은 주인공 생명체들의 내면을 의인화하는 지문을 동원하지만, 말풍선을 통한 대사를 배제하고 있어 완전한 몰입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반면 <디노디노>는 공룡들에게 ‘맛난이’와 같은 이름을 부여하고 대사를 통해 인간적인 감정을 드러내게 하는 등 의인화의 경향이 더 강하다. 개그 터치 등 만화적인 재미를 좀더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두 작품 다 엄격하고도 재미있는 다큐멘터리만화라는 본연의 가치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요즘 우리 학습만화에 판치고 있는 어설픈 오락과 판타지적 과장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본다.이명석/ 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 www.sugarspr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