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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펙스> 본 아가씨,`혹시나` 했다가 `역시나`하고 돌아서다
2003-10-01

역시, 할리우드가 그렇지

상업적으로 성공한 할리우드 영화의 미덕 가운데 하나는 뒤통수 치지 않고 예상치, 기대치를 최대한 만족시켜준다는 데 있을 것이다. <유주얼 서스펙트>나 <식스 센스>처럼 내용상의 반전이 중요한 영화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괜히 폼잡지 않으면서 액션이면 액션, 코미디면 코미디, 멜로면 멜로, 본업에 충실하면 성숙한 관객은 사소한 허술함이나 어설픈 잔가지들은 통 크게 이해하게 마련이다. <트리플X>의 빈 디젤을 보면서 그 황당무계한 배짱을 비웃거나 <금발이 너무해>를 보면서 하버드 법대 입시평가방식에 의구심을 제기하는 사람 봤는가. 짜고 치는 것이되, 설사와 판쓸이, 따닥 등 다채롭고 아기자기한 장치들을 풍부히 마련해 한판의 아름다운 고스톱을 이뤄내면 그걸로 충분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케이-펙스>는 유감천만의 영화였다. 뒤통수를 맞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 아주 기분 나쁜 자세로 머리를 툭툭 치며 “몰랐냐? 이럴 줄” 하고 약올리는 꼴을 당하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지구에서 수천광년 떨어진 리라좌의 케이-팩스 행성에서 왔다는 프롯이 바나나를 껍질째 우걱우걱 씹어먹을 때만 해도 “바나나 먹으러 지구에 온 외계인 이야기인가봐” 킥킥거리며 나는 철모르게 즐거워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감지가 안 된다는 자외선의 감도를 파악하고 세계적으로 몇명의 석학들만 알면서 아직 학계에 정식보고도 되지 않았다는 우주이론을 “우리별에서는 상식”이라며 설파하는 ‘유기체’를 외계인이라고 굳게 믿은 나 같은 관객이 순진한 것인가.

영화는 가증스럽게도 반 넘는 상영시간 동안 <콘택트>의 신비로움과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환자들이 옮겨온 듯한 폐쇄병동 분위기를 그럴듯하게 흉내낸다. 게다가 프롯이 툭툭 내던지는 케이-펙스 별에 대한 설명도 의미심장하다. 케이-팩스 별에는 가족이란 제도가 없고 아이들을 모두 함께 키운다거나, 법도, 국가도 없지만 “무엇이 옳은지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에 지구에서 일어나는 사회문제들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정교하지는 않지만 ‘필연’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온 제도나 삶의 양태들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그러나 반전이라고 말하기도 뭣한, 숨겨졌던 프롯의 비밀은 그 전에 늘어놓은 모든 이야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지워버린다. 5년 동안 잠적하면서 자외선 감지능력을 개발하고, 도서관에 처박혀 천체물리학에 통달하게 됐다고 넘어간다 하더라도, 단지 충격적인 기억만을 하나 툭 끼워넣고 ‘가족이 소중하고 주변 사람들이 소중하니 있을 때 잘해’라고 던지는 메시지는 그가 했던 있어 보이는 말들, 그가 병동 사람들과 맺었던 관계들을 한바탕의 요란뻑적지근한 소동으로 만들어버리는 꼴 아닌가. 첨단의학과 약물이 치유하지 못했던 마음의 병을 한 외계인-? 사기꾼?-의 기이하고 따뜻한 행동으로 고쳐나가던 병자들은 결국 “역시 바보”들이 되고 직업정신 투철한 의사만 사이 나빴던 아들과 화해하면서 남는 장사를 한다. 공동육아고 나발이고, 그저 가족이 최고인 것이다. 할리우드 만세!

할리우드영화에서 가족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기대하는 건 어불성설이라는 거 나도 안다. 가족의 소중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불쾌한 것도 아니다. 가족은 소중하니까. 그러나 아닌 척하고 뭔가 다른 게 있는 척하다가 “실은 다 뻥이야, 집에나 일찍일찍 들어가셔”라고 말하는 건 너무 허탈하다. 가족의 소중함을 이야기하기 위해 수천광년 떨어진 리라좌까지, 엑스파일까지 가져올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하물며 <케이-펙스>가 허탈함을 주목표로 하는 예술영화는 더더욱 아니지 않은가.

더불어 한때 케빈 스페이시의 열광적인 팬으로 그가 최근 들어 착한 마음 전도사로 변모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유감이었다. 그는 신비로우면서도 선지자적인 이 배역의 분위기를 록밴드 유투의 보컬 보노 이미지에서 따왔다는 데 보노가 영화를 봤다면 틀림없이 기분 나빠했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혹시나 기대했다. 초점 잃은 눈으로 휠체어에 앉아 있던 케빈 스페이시가 <유주얼 서스펙트>의 마지막 장면처럼 스르륵 일어나 씩 웃으며 걸어가게 되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이 모든 걸 용서해주마. 어차피 말 안 되기는 다 마찬가지인데 말야. 물론 역시나였고, 진정한 할리우드 키드가 되기 위해서 아직도 나는 배울 게 많다는 교훈만 안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 김은형/ 한겨레 문화부 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