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영화읽기 > 영화읽기
이미지는 어떻게 의미화 되었나?<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권은주 2003-09-24

관념의 건축술과 이미지의 세공술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그리고 김기덕

‘사계’라는 경제적인 단어를 굳이 외면한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하 <봄>)은 롱숏의 영화라는 감독의 언명대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멀리서 ‘보는’ 영화이기도 하다. 사계의 순환이 시작되는 ‘그리고’의 시점은 그 순환에 대한 바라‘봄’의 지점인 것이다. 날것의 구체성을 현저히 추상화시킨 이런 관조적 성찰은 비록 여전히 ‘김기덕 영화’라 해도 그의 인장을 좀더 메타적으로 관찰할 여지를 제공한다. 그것은 손쉽게 지적할 수 있는 표면적인 의미보다 절경을 이루는 이미지들이 어떤 메커니즘에 따라 의미화되는지에 주목하게 한다. 벌써 아홉 번째인 김기덕의 동어반복에 대한 동어반복적 찬반론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거리두기가 필요할지 모른다는 느낌은 이 때문이다.

관념의 집을 짓고 그 집을 관조하다

김기덕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제목만으로도 감이 팍팍 와버릴 이 영화는 ‘사계절에 담긴 인생의 비밀’이라는 카피가 무색할 만큼 별다른 비밀없이 계절과 인생을 등치시킨다. 자연의 반복(기호)과 인간사의 반복(의미)은 이때 유비 관계, 즉 은유로 맺어지며, 은유의 동일성은 반복의 불변성만큼 확고하다. 이 유구한 상징은 도시보다 자연에서 인간의 원초성을 길어낸 김기덕에겐 가장 본질적인 레토릭이다. <봄>의 공간은 모두 이런 은유들의 겹구조로 짜여진다. 영화 내 공간의 전부인 호수는 암자의 작은 연못으로, 부처상 앞의 미니어처 연못으로, 물 담은 고무신으로 축소 반복되는데, 거기엔 어김없이 물고기가 헤엄친다. 갇힌 물과 물고기, 곧 세계와 인간에 대한 은유의 동심원은 벗어날 길 없는 구속성을 강화한다. 호수 기슭과 암자의 입구, 암자 내부에 설치된 출입문은 동심원의 세상 길목마다 겹겹의 액자처럼 배치된 사각 프레임 구실을 한다. <도그빌>처럼 벽이 없어도 그곳을 통해야 하는 문들은 현실과 유리된 상징 공간의 추상성에 걸맞은 시선의 틀이 된다.

이런 원형적 공간 속에서 이미지들은 유사성에 따라 의미와 밀착하는 관념의 집을 만든다. 암자는 욕망과 상처, 계율과 징벌이 펼쳐지는 인간세상의 축소판이고, 호수 바깥의 계곡은 자연 자체이다. 계절마다 간택된 절간의 동물들은 인물의 상황을 대변해주며, 계곡의 물고기-개구리-뱀은 먹이사슬로 연쇄된 인연의 법칙을 함축한다. 자연의 일부일 수밖에 없는 인간은, 동승이 동물들을 죽이게되듯 기어코 그 인연의 사슬에 가담하게 됨으로써 등에 매달린 돌을 업보처럼 지고 살게 된다. 거기서 벗어나는 것은 “남을 쉽게 죽인다고 자기도 쉽게 죽을 순 없”는 것처럼 어렵다. 인간은 그 어려움을 극복하려 한다는 점에 성불의 가능성이 있지만, 청년승의 욕망이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듯 일련의 집착과 번뇌는 김기덕에게 계절의 순환만큼 자연스럽고 그만큼 필연적이다. 자연과 인간을 묶어주는 이 동일성의 법칙은 그 안의 모든 종별화에도 동심원과 액자구조로 적용된다. 인간과 인간을 서로에게 덫이 될 정도로 강제로 결합시키는 김기덕의 점액성은 한 덩어리에 대한 원초적 지향을 깔고 있다. 주목할 점은 이런 성향이 자연에 인간적 시선을 투사하고 기호를 의미의 피라미드로 만드는 은유의 건축술에 잠재한다는 점이다.

관념의 집으로서의 <봄>은 그리하여, 그 자체로 득도의 스펙터클인 듯한 암자가 실은 불교보다 김기덕식 세계관으로 건축되었음을 일러준다. 특히 청년승에게 그곳은 부처님이 초자아처럼 굽어보는 억압의 공간이며, 목탁을 두들긴다고 리비도가 해소되지도 않는다. 그의 욕망은 여자와 한 덩이가 된 나룻배, 즉 상상적 모태로 치닫는다. 아버지 같은 노승의 법에 의해 상상계가 불가능해지자 나룻배는 탈주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운명의 끈과 같아서, 탕자는 돌아오고 끝내 노승의 대를 잇게 된다. ‘그리고 봄’의 동승은 주인공들이 동일성의 법칙에 종속된 하나의 추상적인 ‘인간’일 뿐임을 보여준다. 풍경 소리를 빌렸을 뿐, 호수 위 암자는 <섬>의 뗏목처럼 집요한 운명적 소환의 공간이지 해탈의 공간이 아닌 것이다. 김기덕에게 바다나 강이 체제의 가장자리라면, <섬>이나 <봄>의 호수는 동일성으로 폐쇄된 인간 세상의 알레고리 자체이다.

그럼 불교는 어디에? 아마도 그 유폐된 김기덕식 세계를 익스트림 롱숏으로 굽어보는 산 위에 있을 것이다. 결국 고립무원의 호수는 속세였고, 장년승은 돌을 메고 등산함으로써 딱 한번 속세를 떠난다. 그러나 봄이 되어 다시 소생하는 업보는 회개나 고행으로 극복할 수 없는 착잡한 허무감을 주기도 하는데, 이를 관조하는 라스트의 반가사유상은 김기덕의 자기 성찰적 시선을 대리한다. 물론 부처는 말이 없으며 감독도 결론 같은 건 없다. 다만 부정적 영원회귀와 대면할 수밖에 없는 인간 운명을 차분히 심호흡할 뿐인 듯하다. 가장 인공적인 세트로 지은 자신의 가장 관념적인 집을 바라보면서. 그것이 관념적인 건 불교의 심오함을 담고 있어서가 아니라 이미지를 도식적인 동일성의 섭리로 가득 채워 일반화된 상징들로 환원하기 때문이다. 풍경은 신선하되 그 의미는 신선하지 않은 까닭도 여기 있다.

약동하는 이미지들

오히려 김기덕의 장기는 강박관념으로 축조된 중심 이미지들보다 반복된 테마의 억압성에서 한발 물러나 있는 작은 아이디어들에 있는 듯하다. 유사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비은유적인 기호들이 그것이다. 청년승이 부처상을 지고 떠난 뒤 노승이 고양이를 지고 나타날 때, 부처와 고양이는 아무 관련이 없지만 같은 자리에 놓인다. 노승이 입적한 자리의 뱀이나, 얼굴 가린 여인이 빠진 웅덩이 위의 부처상도 마찬가지다. 부처는 계속 다른 기호들의 가면을 쓰고 이동한다. 인접 기호들로의 이런 환유적 이동은 동일성의 일반 법칙을 비껴가는 동시에, 부처의 보편성이 만물의 개별성과 멀지 않음을 보여준다. 언제 어디서 어떤 차이 속에 나타날지 모르는 부처는 긍정적 영원회귀의 가능성이며, 자기 바깥에 모시고 복종해야 하는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에게 잠재된 내면화의 표상일 것이다. 부처상(노승)을 틸팅한 숏과 부처상의 부감 시점숏에서는 종교가 청년에게 수직적 위계로 작용하지만, 반가상을 안고 산을 오르는 장년승은 정상에 이르렀을 때 부처의 시점을 자기화하기에 이른다.

여기에는 물론 수련이 필요한데, 그것은 영화의 설정숏 같은 관념적 이미지의 건축술이 아니라 영화 안에서 직접 행해지는 텅 빈 이미지의 세공술로 나타난다. 반야심경 파기가 마음을 다스리게 하는 것은 청년이 문자의 의미를 이해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마룻바닥의 물질성 자체인 텅 빈 이미지, 그 의미없음과의 집요한 대면을 통해 칼에 묻은 업보의 핏자국을 씻는 것이다. 이미지 세공은 곧 인간적 의미의 비움이고, 기호의 동일성을 보증하는 의미로부터 이미지를 해방시켜 미적 의미의 차이를 새롭게 탄생시키는 예술이다. 관객 역시 반야심경을 알아볼 순 없지만, 속세의 형사들까지 참여한 퍼포먼스가 하나의 작품이 되는 과정은 즐길 수 있다. 기왓장에 물로 붓글씨를 쓰는 노승은 잠깐의 흔적만으로 존재할 뿐인 생성 자체의 기호를 통해 색즉시공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의미에 집착하지 않고 의미를 욕망하지 않는 이미지 생성과 이를 통한 자기 수련은 얼음 조각과 무술 연습이 그렇듯 창조적 유희에 가깝다. 근엄한 표정의 김기덕이 얼음판을 스케이트 타거나, 노승이 닭으로 배를 견인하고 고양이 꼬리로 글씨 쓸 때의 위트는 마음이 자유로워진 경지에서 가능하다. 극도로 추상화된 관념-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봄>이 지루하지 않은 건 관념에 눌리지 않는 작은 환유적 이미지들의 창조적 약동 덕분이다. 아마도 이 점이 더 불교적일 것이다.

열린 파편들을 위하여

이미지 수사학의 메커니즘은 김기덕에 대한 옹호나 비판의 맥락에도 적용될 수 있다. 여전히 인물은 납득되기보다 들이밀어지며 사건은 필연적이기보다 강제적이지만, 세련되지 못하다고 늘 욕해봐야 김기덕은 김기덕이다. 요는, 이미지만으로 말하는 듯해도 그의 이미지는 끈적하게 상징화된 은유이며, 궁극에는 자연과 인간의 동일성에 반복적으로 종속된다는 점이다. 동승의 악마적 웃음은 매우 어색하고, 아내를 죽인 청년은 <해안선>의 강 상병만큼 절제라곤 조금도 모르며, 처연한 여자들은 언제나처럼 발언권도 없이 남자에게 이끌려 죽지만, 구체적 개별성의 그럴듯함은 김기덕의 관심사가 아니다. 플라톤주의자에 가까운 그는 전혀 쿨하지 못한 세계관을 이데아 삼아 이미지의 실존을 착취한다. 대사가 드물수록 이 의미의 폭력은 두드러지기에, 역으로 이런 직접화법은 국제적인 소통을 가능케 하기도 했다. 시적이지만 매우 잘 읽히는 시가 그렇듯.

<봄>은 이런 의미화에 있어 ‘아트’ 냄새 풍기는 적요의 이미지들로 가득하며, 그만큼 국제적인 구미를 당길 만하다. 동양적으로 선회할수록 서구에서 호평받는 아이러니는, <봄>의 관념-이미지 건축술이 불교 본연에서 빚어졌다기보다 ‘불교의 색채까지 가미한’ 김기덕의 것이란 점에서 문제적인 구석이 있다. 그나마 불교의 가르침을 육화하는 공(空)의 이미지들마저 전통적 재현 체계에 넌더리를 낸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겐 일찌감치 찬사의 대상이 된 바 있다. 동양인에게 내면화된 오리엔탈리즘까지는 아니더라도, 불교가 종교적 깊이로서보다 현대적으로 쉽게 먹히는 문화적 클리셰처럼 활용된 혐의는 딜레마로 남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한계는, 지적하는 평자 역시 피할 길 없는 이 땅의 문화풍토와 관련된 문제다. 오종만큼 잽싸고 트리에만큼 종교적이지만 그들보다 조야한 김기덕은, 그래도 불교를 발판 삼아 과감하게 자기 얘기를 변주할 수 있는 한국의 작가이다. 이런 조건에선 그 경계를 조금씩 넓혀가는 것 외에 다른 최선은 없다. 그리고 테마보다 재미있는 여담 만들기와 상징보다 새로운 이미지 생성은 김기덕의 창조적 잠재성으로 지속될 것 같다. 그의 열 번째 영화가 궁금해지는 것도 그의 이데아로 쉽사리 흡수되지 않는 열린 파편들 덕분이다.정승훈/ 영화평론가 reptile2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