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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영화] 한국형 SF <내츄럴 시티>
2003-09-19

디스토피아에 갇힌 절망적 사랑

2080년 미래의 도시에, 사랑 때문에 사회부적응자가 돼버린 한 남자가 있다. 직업은 특수경찰로, 남들이 부러워하는 요직이지만 이 남자 R(유지태)은 직업에 충실하거나 거기서 성공하고 싶은 욕망이 없다. 머리속엔 오로지 자기가 사랑하는 사이보그밖에 없다. 클럽에서 춤추는 댄서의 용도로 만들어진 이 여자 사이보그 리아(서린)는 수명이 3일밖에 남지 않았다.

R은 전투력이 뛰어난 정예요원이다. 그러나 리아를 살리기 위해, 폐기해야 할 사이보그의 인공지능 칩을 밀매하고 리아의 영혼을 보통 인간에게 더빙시키기 위해 멀쩡한 사람을 납치하려고까지 한다. 그에겐 정의와 불의의 구분조차 사라졌다. 그는 왜 이렇게 망가졌을까. 미래 사회의 제도에 염증을 느끼기 때문일까. 단순히 사이보그에 대한 사랑 때문인가.

‘세상에서 제일 정확한 게 사이보그 수명’이라는 리아의 독백에서 시작해, R의 망가진 모습을 그려가는 도입부는 매력적이다. 하수관 안에서 사이보그와 특수경찰들이 벌이는 전투장면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부럽지 않다. R의 캐릭터를 묘사하면서 환경 오염, 극심한 계급격차 등 미래사회의 디스토피아적인 풍경을 배경으로 흐르게 하는 연출도 세련돼 보인다. 여기서 영화는 좀더 모험을 감행한다. R의, R과 리아의 전사에 대한 설명 없이 줄곧 앞으로 치달으며 예정된 파국을 그려간다. 이건 일관성 있고 담백한 태도로 볼 수 있지만, 거기에 R과 리아가 함께하는, 또는 R 혼자 괴로워하는 장면을 대사 없이 뮤직비디오처럼 수시로 삽입한다. 감정과잉이 생기고, 이게 다른 이야기들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걸 방해한다.

R은 한 과학자의 말에 따라 리아의 영혼을 인간에게 더빙시키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그 과학자는 다른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따른 전투가 후반부를 장식하는 이 영화의 이야기 틀은, 지난해부터 나왔던 일련의 한국형 블록버스터들에 비해 잘 짜여진 편이다. 그러나 영화의 감정선을 관객과 공유하기에는 미흡한 구석이 있다. R과 리아의 감정표현이 강조되면서, R과 과학자와의 관계 등 다른 사연들은 설명되기에 바빠진다. 리아를 향한 R의 사랑의 묘사도 관념적이고 단선적이다. 여느 멜로처럼 좀더 안으로 들어가 둘의 자세한 사연을 보여주지도 않고, 그렇다고 원경으로 빠져나와 이 기이한 사랑을 낳은 미래사회의 겉과 속을 두루 비추지도 않는다.

이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내츄럴 시티>는 SF 장르의 필요한 요소들을 놓치지 않고, 캐릭터 중심으로 끌고가는 일관성이 있고, 특수효과와 액션 연출 등 화면이 한층 세련돼졌다는 점에서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한 가능성을 내비치는 영화다. <유령>의 민병천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고 메가폰을 잡으면서 총제작기간 5년에, 제작비 76억원이 들어갔다. 26일 개봉.

임범 기자 ism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