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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밍 풀> 다녀온 아가씨,나이듦에 관해 숙고하다
2003-09-16

질투는 그녀의 힘

지난주 <스위밍 풀>을 보던 날 우연히 진짜 ‘스위밍 풀’에도 가게 됐다. 한강시민공원 수영장이 폐장을 하루 앞둔 8월31일, 여름이 가기 전에 한번이라도 선탠을 해야겠다는 한 친구와 아무 생각없는 나머지 둘은 그 선선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수영장에 갔더랬다.

그 많던 파라솔 중에 하필 곰팡이가 덕지덕지 끼고 천 따로 우산살 따로 놀던 파라솔을 편 다음- 영화에 등장했다면 엄청난 복선이 깔린 장면이었을 거다- 우리는 돛자리를 깔고 앉아 열심히 오일을 발라댔다. 내 친구들은 실외 수영장이라고 비키니까지 입은 차림이었는데 그 자태란… 좋게 말해서 장군감이라고나 할까, 잘 키운 딸 하나 열 장정 부럽지 않다고나 할까, 뭐 그런 거였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우리의 수영장행은 <스위밍 풀>의 전주곡, 본 행사가 시작되기 전의 집단 퍼포먼스 같은 것이었다. 삼인조 ‘사라’들이 목욕탕에서 옆사람 등밀어주는 자세로 열심히 서로에게 오일을 발라주는 동안 옆옆옆 자리에는 사인조 ‘줄리’들이 선베드까지 꿰차고 누워 우아한 자태로 늦여름 오후의 태양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가끔 줄리들이 물에 들어가면 갑자기 한가하던 풀이 북적대면서 여기저기 색깔도 예쁜 비치볼까지 날아다녔다. 사라들이 들어가면 50m 정도되는 풀 끝에서 끝까지 쉼없이 왕복해도 부딪치는 사람 하나없어 수영실력 키우기 딱 좋았다.

영화에서 본 가락은 있어 우리도 나른한 자태로 누워 있기는 했으나 선글라스 너머로는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요즘 애들은 어쩜 저렇게 다리가 기냐”, “배짝 마른 애가 가슴은 엄청 빵빵하네” 듣기에도 한심한 말을 소리죽여 지껄여대면서 맹렬한 질투심을 쓸어담았다. 줄리들? 줄리에게 사라 따위가 안중에 있겠는가. 처지는 뱃살과 떨어지는 기억력, 노후생계에 대한 연민과 각성이 시작되는 순간, 청춘은 더이상 청춘이 아닌 걸.

특별한 사건, 사고가 개입하지 않는다면 아직은 먹은 나이보다 먹을 나이가 더 많겠지만 나이드는 게 쉬운 일이 아님을 갈수록 절감하게 된다. 나이야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르면 저절로 먹는 것이지만 나이에 적응하는 건 쉽지 않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매일 맛없는 요구르트에 과일만 먹다가 줄리가 사다놓은 맛있는- 그러나 건강에 좋을 리 없는- 음식들을 게걸스럽게 훔쳐먹는 사라의 행동은 차라리 애교로 봐줄 만하다. 한때 잘 나갔던 작가로 아이디어의 고갈과 창작의 한계를 느끼는 사라가 독자 앞에서 아예 자신을 부정해버리는 영화의 첫 장면이야말로 묘한 착잡함을 느끼게 한다. 늙음, 쇠락함을 받아들이는 건 정말이지 때로는 지구 전체를 두팔로 들어올리는 것보다 어려운 일인가.

현실과 환상을 모호하게 처리한 영화내용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지만 남프랑스 별장에서 벌어진 모든 사건을 사라가 만들어낸 이야기로 받아들인 나로서는 이 모든 게 사라가 젊음을 향해 벌이는 늙음의 복수- 무섭기도 하고 유치하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부신 얼굴과 육체를 가진 줄리가 집으로 끌어들이는 남자들을 보라. 나는 프랑스에도 그렇게 얼굴 큰 남자가 있다는 걸 이 영화 보고 처음 알았다. 왜 맞았는지 어느 날 눈탱이가 밤탱이가 돼온 줄리의 멍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지워지지 않으며 줄리의 과거사는 점점 더 불행한 것이 돼가고, 줄리는 그것을 사라 앞에서 고해성사함으로써 결국 사라는 줄리를 자신의 앞에 무릎 꿇린다. 그리하여 밤샘 삽질을 통해 맺어지는 두 여성의 연대감이란….

그럼에도 나는 사라가 추하다거나 교활한 뱀 같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아무래도 영화를 보기 전에 수영장에 갔다왔기 때문인 것 같다). 나이가 들면 연륜도 생기고, 지혜로워지고, 이해심도 많아지고, 상태 좋아하지는 게 백 가지도 넘는다고들 하지만 서투르고, 헤매고, 불안한 청춘만 못한 것이다. 게다가 그 젊음이란 게 누구나 한번씩 가져본 것 아닌가. 이미 지녀본 것을 잃었는데 어찌 질투가 나지 않겠는가. 사라가 추하지 않은 건 질투가 추하지 않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실 그 질투가 없었더라면 과연 오랜 시간 금지하고 억압했던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열어젖혔겠으며 평생의 역작을 완성했겠는가.

이제부터 나도 사라처럼 ‘질투는 나의 힘’삼아 살아야겠다. 쭉빵한 애들 질투나서 운동도 열심히 하고 영어 잘하는 요즘 애들 질투나서 영어공부도 하고, 나이도 어린 게 나보다 유식한 애들 질투나서 책도 많이 읽어야지. 그러면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하겠지? 나이드니 연륜도 생기고, 지혜로워지고… 참 보기 좋다고. 역시 나이드는 데 적응하는 건 쉬운 게 아니다.김은형/ <한겨레> 문화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