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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종합선물세트 [9] - 재즈를 위한 영화와 음반 10선 ②

재즈의 흥분, 그 극한 <모 베터 블루스>

알코올과 약물의 상흔이 깊이 패어 있는 재즈계가 오늘날 이들의 유혹으로부터 철저히 거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은 스파이크 리 감독의 90년 영화 <모 베터 블루스>의 주인공 블릭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마살리스 형제들로 상징되는 80∼90년대 재즈 뮤지션의 스마트한 위상은 전혀 뜻밖의 함정을 통해 위기로 빠져들 수도 있다. 그것은 인생에 화려한 절정 뒤에 매복하고 있는 오만과 우유부단이다.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 음반은 브랜포드 마살리스와 빌 리(스파이크의 아버지)의 작품들로 채워져 있지만 사실 영화 속에는 사운드트랙에 담기지 않은 중요한 재즈의 고전 두곡이 등장한다. 그 첫 번째 곡은 청부업자들의 폭행으로 입술이 터진 블릭이 병원에 누워 있는 장면에서 흐르는 찰스 밍거스의 59년 작품 <Goodbye Pork Pie Hat>이다. 밍거스의 음반 <Mingus Ah Um>(콜럼비아)에 실린 곡으로, 그해 레스터 영이 파리에서 뉴욕으로 돌아오자마자 세상을 떠났을 때 밍거스가 그를 추모하며 만든 진혼곡이다. 흑인 교회적인 작품의 분위기는 다분히 밍거스다운 것이지만 부커 어빙의 그답지 않은 부드러운 테너 사운드는 확실히 레스터 영에 대한 애잔한 오마주다. 이보다 조금 더 격렬하게 빅밴드 편성으로 녹음한 63년 버전(임펄스 레코드의 음반 <Mingus Mingus Mingus>에 실려 있다)도 훌륭하지만 오리지널 버전에서 묻어나는 그 허무는 자꾸 그곳으로 손이 가게끔 만든다.

(위쪽부터 차례로)♣ 아프로-쿠반 재즈의 고전 <Manteca>의 최고의 연주를 들을 수 있는 57년 디지 길레스피의 실황음반 <Dizzy Gillespie at Newport>♣ 런던에서 망명을 시도했던 당시의 아루투로 산도발과 길레스피 빅밴드와의 연주가 실린 <Live at the Royal Festival Hall>. ♣ 빅밴드 레코딩의 가장 이상적인 구현이라 할 수 있는 <Chairman of the Board>. 좌우 채널을 통해 팽팽하게 맞서는 색소폰과 트럼펫 섹션의 대칭이 인상적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두 번째 고전은 존 콜트레인의 64년 모음곡 <A Love Supreme>(임펄스)의 첫 번째 악장 <Acknowledgement>다. 이 곡은 방황하던 블릭이 진실했던 여인 인디고와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기르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영화의 종반부에 흐르는데(이 음반의 표지는 대형 사진이 되어 블릭의 거실에 걸려 있다), 약물의 위기로부터 새로운 삶의 길을 발견한 콜트레인이 만년에 신께 바친 일종의 고해성사란 점에서 절묘한 감동을 준다. 하지만 이 작품의 진가는 음반을 통해 전체 악장을 온전히 들었을 때 느낄 수 있다. 약 33분에 이르는 이 모음곡은 구도의 숭고함 속에서도 재즈의 흥분을 끝까지 관철시켰다는 점에서 콜트레인 음악의 정점을 들려준다.

비장한 열기 <리빙 하바나>

<라운드 미드나잇>이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재즈 뮤지션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면 <리빙 하바나>(원제는 <For Love or Country>)는 재즈가 금지된 땅에서 재즈를 열렬히 사랑한 한 연주자의 모습을 담고 있는 영화로, 쿠바 출신이자 90년 미국으로 망명한 재즈 트럼펫 주자 아르투로 산도발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산도발 자신이 직접 음악을 담당한 영화다. 그가 망명 이전부터 미국 재즈계에 그 이름을 알렸던 것이 찰리 파커와 함께 모던재즈를 창조했던 디지 길레스피의 협력 덕분이었기에 이 영화에는 그의 음악이 다수 등장하는데 특히 영화 도입부를 장식한 길레스피의 작품 는 압도적이다. 47년에 작곡된 이 아프로-쿠반 재즈의 고전을 길레스피는 여러 차례 녹음했지만 그중에서 57년 실황음반 <Dizzy Gillespie at Newport>(버브)에 담긴 연주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리 모건, 베니 골슨, 윈튼 켈리 등 당시 ‘젊은 사자’들로 이뤄진 그의 빅밴드가 뿜어내는 열기는 쿠반 재즈의 표본, 바로 그것이다(분명히 말하지만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의 음악은 너무도 훌륭한 쿠반 음악이긴 해도 쿠반 재즈는 결코 아니다). 아울러 영화의 마지막 부분, 산도발은 길레스피 빅밴드와의 유럽 투어에 참여해 런던에서 망명을 시도하는데 당시 긴장과 번민에 휩싸였을 산도발의 연주는 디지 길레스피의 90년 음반 <Live at the Royal Festival Hall>(엔자)에 그대로 담겨 있다. 영화를 본 뒤 다시 음반을 들었을 때 느낀 것이지만, 산도발의 연주는 어쩌면 인생의 마지막 연주가 될지도 모른다는 비장한 열기를 곳곳에서 토해낸다. 이렇듯 영화는 음악을 새롭게 듣도록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90년대 최고의 재즈 사운드트랙 <캔자스 시티>

<CBS>에서 방영된 특집 프로그램의 음원을 CD에 담은 <The Sound of Jazz>에서 지미 러싱의 명연으로 <I Left My Baby>를 들을 수 있다.

로버트 알트만의 95년 영화 <캔사스 시티>는 재즈에 관한 영화는 아니지만 그 어떤 영화보다도 재즈와 재즈 연주장면이 비중있게 쓰인 영화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여러 장면들은 공황기 재즈의 새로운 메카로 떠올랐던 캔자스 시티에 대한 아주 그럴싸한 허구적 고증(?)으로 재즈팬들을 열광시킨다. 예를 들어 영화의 도입부에서부터 클럽 유리창에 붙어 있는 “재즈의 전쟁, 콜맨 호킨스 대 레스터 영”이란 제목의 포스터는 34년 캔자스 시티에서 벌어졌던 두 명인의 전설적인 철야 연주대결을 근거로 한 것이며 흔치 않은 여성 피아니스트의 등장, 그리고 열띤 테너 색소폰들의 각축은 당시 캔자스 시티의 명인들이었던 메리 루 윌리엄스, 벤 웹스터, 허셸 에반스를 한눈에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진짜 기막힌 장면은 뚱뚱한 몸집의 가수 한명이 무대가 아닌 바 안쪽에서 <I Left My Baby>를 부르는 장면으로, 이 모습은 역시 이 중서부 도시 출신의 가수 조 터너와 지미 러싱(이들은 모두 거구였다)이 바텐더 혹은 햄버거 가게 종업원이었다는 숨겨진 사실을 정확히 끄집어낸다.

단언하건대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은 90년대 발매된 수많은 재즈음반 가운데서 손에 꼽힐 명반이다(아직 들어보지 못한 재즈팬이 있다면 반드시 들어보라!). 특히 케빈 마호가니가 부른 <I Left My Baby>는 캔자스 시티의 걸쭉한 블루스 잼세션이 아직 살아 있음을 들려준다. 하지만 이 곡의 원래 주인인 지미 러싱도 이에 못지않은 명연을 남겼는데, 57년 <CBS>에서 방영된 특집 프로그램의 음원을 CD에 담은 <The Sound of Jazz>(콜럼비아)에 이 연주가 실려 있다. 여기에는 카운트 베이시를 비롯해 레스터 영, 콜맨 호킨스, 로이 엘드리지 등 스윙시대를 호령했던 명인들이 대거 등장해 그들의 유장한 솔로를 들려준다.

<캔자스 시티>에서 재즈팬에게 인상적이었던 또 하나의 장면은 대리모가 되기 위해 이 도시를 찾아왔다가 길을 잃은 한 흑인소녀를 고적대의 흑인소년이 늦은 밤 재즈클럽으로 데려가는 대목이다. 이때 이 소년은 소녀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저기 저 사람이 레스터 영이야.” 그리고 이때 카메라는 레스터의 사운드를 90년대로 이어간 테너맨 조슈아 레드먼을 클로즈업한다. 이 장면에서 연주되는 곡은 캔자스 시티 재즈를 대표했던 명곡 <Moten Swing>으로, 이 곡은 20년대 후반부터 이곳을 장악했던 베니 모텐의 곡이지만 이 곡을 널리 알린 인물은 복마전과 같았던 캔자스 시티 재즈계의 최후 승자 카운트 베이시였다. 그는 이 곡을 여러 번 녹음했다. 하지만 58년 음반 <Chairman of the Board>(룰렛)에 담긴 연주는 그야말로 빅밴드 레코딩의 가장 이상적인 구현이라 부를 만한 호연이다. 좌우 채널을 통해 팽팽하게 맞서는 색소폰과 트럼펫 섹션의 대칭은 재즈 오케스트라의 매력이 무엇인가를 명확히 들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