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카툰을 권한다
‘디지털’이라고 말하자 ‘돼지털(어찌 들으면 되지퉁이라고도 들린다)?’이라고 되묻는 CF가 있었다. 흔히 디지털이라고 하면 기계와 인간이라는 낯설고 차가운 금속성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는데 그 CF는 디지털이 오히려 사람과 사람을 이어준다고 주장했다. 그럴까? 정말 디지털 기술이 이 험난한 세상에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다리가 될 수 있을까?
지난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 2003. 너무 적은 공간을 풍부한 볼거리로 채워 동대문 옷가게 스타일처럼 느껴지던 디지털 카툰전에서 그 가능성의 한 자락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자리에 걸린 카툰은 액자가 아닌 LCD 모니터를 통해 존재했으나 현란한 움직임이나 음향을 동원하지 않고 나지막하고 잔잔하게 반복되며 LCD 모니터를 액자로 변환시켰다. 전시디렉터인 모해규 작가가 오랜 시간 의지를 갖고 준비한, 작은 움직임과 주기적 반복, 약간의 음향이 어우러진 디지털 카툰은 ‘디지털’ 기술이 어떻게 아날로그와 만나 더 풍부한 울림을 만들어내는지를 설명해주는 매력적인 텍스트였다. 숨가쁘게 발전된 디지털 기술에 만화가 맞추어진 것이 아니라 만화의 특성에 디지털이 활용되어 더욱 반가웠다. 카툰은 1칸에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는 메타포의 매체다. 카툰의 메타포는 풍자와 유머, 그리고 시적 상상력으로 존재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카툰은 이상하게 시사만화, 즉 정치풍자만화로만 국한되어 수용되었다. 하지만 카툰의 매력은 1칸에 벼려지는 유머, 오랜 시간 내 마음에 남는 시적 울림 같은 것들이다. 시간이 지나도, 머리에 남아 있는 만화. 그것이 바로 전세계적으로 카툰이 사랑받는 이유일 것이다.
모해규는 이번 SicAF 전시 이전부터 디지털 카툰의 모델을 고민하고 스스로 해답을 찾아나갔다. 웹진 <화끈>에 발표한 <늙은 왕자>는 그 시초가 되는 작품으로 기억하는데, 외로운 소행성에 앉아 TV와 술을 벗하는 늙어버린 늙은 왕자의 모습이 서글픈 배경음악과 함께 무한반복되는 작품이었다. ‘어느 날 난 마흔세번이나 해지는 것을 보았어’라는 글자가 사라지며 등장한 이미 꺼져버린 TV를 응시한 힘없는 눈빛의 늙은 왕자. 이 작품은 과도한 움직임이나 효과가 아닌 개별 카툰의 의미를 확대할 수 있는 디지털 기술이 단순한 반복이나 음악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SicAF 2003 행사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디지털 카툰전의 작품들이 책으로 묶여 CD롬과 함께 출판되었다. <긋모닝 디지털, 굿모닝 카툰>이라는 제목인데, 53편의 디지털 카툰과 그만큼의 또 다른 카툰이 수록되어 있다. 몇 작품을 보자. 강일구의 카툰은 시다. 간결한 선으로 넉넉하게 감상의 공간을 제공해주더니, 그 카툰이 디지털을 만나 또 다른 맛의 시가 되었다. 한 사람이 자다 두 사람이 되고, 가족이 되다 늙어 서서히 사라지는 <길>이라는 카툰은 인간의 삶을 관조하게 해준다. <이별의 아픔>은 어떤가. 신문을 아무렇지 않게 보다가 눈물이 흐르고, 그 눈물이 자동차가 되어 떨어진다. 나는 그 마음을 안다. <채울 수 없는 빈잔>이라는 작품도 마찬가지다. 눈물이 흘러 무엇이 되는가를 지켜보시라. 이렇게 동영상이 적극적으로 결합된 작품과 달리 효과음 하나로 카툰의 유머를 극대화하기도 한다. 미녀의 피를 빠는 드라큘라 백작의 목에 달라붙은 모기라는 아이러니를 표현한 심차섭의 <모기>라는 작품은 날카로운 모기의 효과음으로, 외계인을 붙들고 UFO의 빛에 독서를 하는 라는 작품은 묘한 비행음으로 카툰의 유머를 강화한다. 신명환의 유머도 독특한데, <눈사람 아이스크림>은 강력한 효과음과 무한반복의 효과를 통해 아이스크림 생산의 비밀을 벗겨낸다. 삼박자의 <사춘기>는 애니메이션에 가깝다. 하지만 폭넓게 이것도 디지털 카툰에 포함된다. 단순하면서도 풍부한 이미지가 인상적이었다. 유승하의 <집안벌이>는 단순한 반복과 적절한 배경음악이 만화의 해석에 어떻게 기여하는가를 보여준다. 재봉질에 열심인 엄마가 잠자는 아기의 모습을 걱정스럽게 돌아보는 얼굴표정은 애처롭다. 카툰에 흐르는 자장가의 선율이 너무 고와 더욱 애처롭다. 최호철의 <개간>은 한칸을 확장시킨 카툰의 새로운 시도다. 많은 이야기를 효과적인 반복과 연결을 통해 담아낸 이 작품은 카툰과 이야기만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디지털 카툰의 새로운 확장을 보여준다.
53편의 작품 모두 재미있다. 더 나아가 이 한권의 책을 통해 디지털 카툰과 인쇄된 카툰을 넉넉히 공유할 수 있어서 즐겁다. 에세이만화, 감성만화가 한창 유행이지만 정통 카툰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이런 때에 스스로 정통 카툰임을 주장하는 <굿모닝 디지털, 굿모닝 카툰>의 작품들이 카툰의 힘을 독자들에게 알려주기를 바란다. 나는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을 통해 유쾌한 유머, 삶에 대한 고민, 따뜻하게 주변을 바라본 시선, 시적 풍부함, 메타포의 재미 등을 모두 느낄 수 있었다. 디지털 카툰을 권한다. 박인하/ enterani@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