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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의 로맨틱한 이미지란? <캐리비안의 해적: 블랙펄의 저주>
김현정 2003-09-02
■ Story

잭 스패로우(조니 뎁)는 10년 전 반란을 일으킨 선원들에게 자신의 배 블랙펄을 빼앗긴 해적 선장이다. 혼자 대양을 떠돌던 그는 자메이카의 로열포트에 이르러 유령선처럼 변해버린 블랙펄과 재회하게 된다. 아즈텍의 황금을 훔친 블랙펄의 선원들은 영원히 죽지 못하는 저주에 걸린 처지. 보물을 모두 제자리에 돌려놓고 피의 제물을 바쳐야만 고대 신들이 내린 저주를 풀 수 있다. 그들은 로열포트를 습격해 아즈텍의 마지막 목걸이를 가진 총독의 딸 엘리자베스(카이라 나이틀리)를 납치하고, 엘리자베스를 사랑하는 어린 시절 친구 윌(올랜도 블룸)과 스패로우는 그뒤를 쫓는다. 해적들은 목걸이의 원래 주인이 윌이라는 사실과 윌의 혈통에 숨겨진 비밀을 모르고 있다.

■ Review

조니 뎁은 “어렸을 때, 나는 해적에 매혹됐었다. 바다에서 머리는 바람에 나부끼고, 모험과 로맨스, 그리고 보물이 있는 로맨틱한 이미지에”라고 말했다. 조니 뎁과 수많은 소년들을 사로잡은 이미지 덕분에, 포악한 강도에 불과했을지도 모르는 해적들은 전설 속 영웅처럼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캐리비안의 해적: 블랙펄의 저주> 제작진이 참고로 삼은 헨리 모건도 예외는 아니었다. 17세기 후반, 스페인령 파나마를 습격해 악명을 떨쳤던 모건은 존 스타인벡이 처녀작 <황금잔>의 주인공으로 삼기도 했던 영국의 해적. 그는 카리브 연안에서 스페인군을 몰아낸 공로를 인정받아 뒷날 로열포트 사령관으로 임명됐고, 영국 여왕으로부터 헨리 모건 경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다. 모건은 여러모로 ‘캐리비안의 해적’의 대표가 되기에 손색이 없는 인물이었다.

잭 스패로우도 처음 등장하는 모습만큼은 풍운아 헨리 모건이 부럽지 않다. 조니 뎁은 스패로우의 이미지를 만들면서 롤링스톤즈의 기타리스트 키이스 리처드를 떠올렸다. 화려한 두건과 짤랑거리는 귀걸이, 가늘게 땋아내린 수염, 검게 칠한 눈화장 차림으로 돛대 위에서 바람을 맞는 해적 선장 스패로우는 록스타처럼 가슴을 쿵쾅거리게 만든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상하다. 스패로우는 황급히 너덜거리는 쪽배 바닥으로 내려와 바가지를 들고 바쁘게 물을 퍼낸다. 카리브해에 풍파를 일으킬 만큼 해적으로서 유능하지만, 로열포트의 제독이 “내가 만난 최악의 해적”이라고 한탄할 만큼 허술하기도 한 스패로우. 지금까지 해적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이 느긋한 ‘캡틴’은 제작비 1억2500만달러가 들어간 대작 <캐리비안의 해적: 블랙펄의 저주>에서도 가장 가치있는 보물이다.

멍하게 떠다니는 것 같은 느낌의 조니 뎁은 해적의 상식도, 양민의 상식도 멀찌감치 치워버리는 스패로우를 달인처럼 연기했다. 스패로우가 바라는 것이라고는 그물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누덕누덕한 돛을 단 블랙펄호뿐이다. 그에게 블랙펄은 자유를 뜻하기 때문이다. 무인도에 버려져도 일단은 럼주를 퍼마시는 것이 중요하고, 교수대 앞에서 밧줄을 목에 걸고 한심하게 배실거리는 스패로우는 <고래사냥>의 안성기를 떠올리게도 한다. 착하고 성실한 젊은이 윌은 <고래사냥>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신만의 방법으로 세상을 휘젓는 스패로우를 따라다니면서 어른이 되고 연인이 된다.

이런 성장의 테마는 제작자 제리 브룩하이머가 고집해온 주제이기도 하다. <더 록> <아마겟돈> 등에서 철없는 후배와 남자다운 선배를 나란히 세웠던 브룩하이머는 이번에도 기묘한 커플을 창조해냈다. <슈렉>의 솜씨좋은 작가 테드 엘리엇과 테리 로시오가 시나리오를 썼다고는 해도, <캡틴 테일러> 못지않은 엉뚱한 캐릭터를 만드는 데 더해, 모험과 성장, 로맨스와 코미디를 적절한 호흡에 따라 배치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영화의 ‘원작’이 디즈니랜드의 놀이기구라는 어처구니 없는 사실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는 “제리 브룩하이머가 제작했기 때문에, <캐리비안의 해적: 블랙펄의 저주>는 스탈린그라드 포위작전보다도 거창한 폭발이 난무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한 영화 안에서 몇번씩 장르를 바꿔가며 2시간30분을 롤러코스터의 속도로 이끌 수 있는 제작자는 흔치 않다. 게다가 브룩하이머는 <더 록>이 걸출하게 표현했던, 남자들의 비극과 그늘을 알고 있다. <캐리비안의 해적: 블랙펄의 저주>는 최근 실패한 해적 애니메이션 <보물성> <신밧드: 7대양의 전설>이 놓쳤던 음산한 기운을 죽은 자들이 무덤에서 일어나 춤추는 중세의 그림처럼 되살렸다.

블랙펄의 선원들은 달빛을 받으면 해골로서의 본모습을 드러낸다. 수십구의 해골이 갑판으로 떨어진 엘리자베스를 맞아 죽음의 축제처럼 장난을 치는 장면은 매끄러운 해적영화들에서 찾을 수 없었던, 극단의 길을 택한 이들의 지옥을 호탕하게 펼쳐놓는다. 칼과 총을 든 해골들이 검푸른 바다 밑을 헤치며 영국 군함을 향해가는 장면이나 아귀지옥에 빠진 것처럼 채울 길 없는 욕망에 시달리는 시체들은 놀이동산처럼 즐겁기만 한 이 영화에 진정 해적다운 싸늘한 면모를 부여하는 요소. <캐리비안의 해적: 블랙펄의 저주>는 조니 뎁을 사로잡은 해적의 로맨틱한 이미지가 무엇인지 알고, 그 이상도 아는 영화다.

:: 에르난 코르테스와 아즈텍 문명

황금의 저주를 아느냐!

카스티야 태생의 스무살 청년 에르난 코르테스는 1504년 맨몸으로 아메리카에 도착했다. 그는 무법자에 가까웠고 정부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했지만, 그가 이끈 1519년 멕시코 원정은 코르테스뿐만 아니라 찬란했던 아즈텍 문명의 운명까지도 바꿔놓았다. 그무렵 코르테스의 모국 에스파냐는 국가 재정의 1/4을 멕시코와 페루에서 가져온 금괴와 은괴로 충당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에스파냐 정부는 빼앗은 금의 1/5만 정부에 바친다면 어떤 약탈도 눈감아주곤 했다. 황금에 고무된 코르테스는 고작 5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인구 100만명에 달하는 아즈텍 제국을 침공했고, 손쉽게 수도 테노치티틀란에 입성했다. 멕시코 인들이 백인 군대를 흰 피부의 날개 달린 신 케찰코아틀로 착각해 초기에 허점을 보인 탓이었다. 코르테스에게 아즈텍은 눈부신 황금의 제국이었다. 지휘관들은 황금으로 만든 방패를 들고 있었고, 귀족들은 커다란 보석과 황금 장신구로 치장하고 있었다. 황제 몬테수마를 생포한 코르테스는 기지로 금을 모아들여 녹인 다음 커다란 황금봉의 형태로 저장했다. 그러나 1520년 ‘슬픈 밤’, 수도에 머물던 코르테스 군대는 아즈텍인들로부터 포위공격을 받았고, 간신히 몸만 빠져나갔다. 그날 가장 먼저 살해된 이들은 아즈텍의 황금을 포기하지 못해 몸이 무거웠던 자들이었다. 황금의 저주라고 할 수 있을까. 코르테스는 군대를 정비해 1521년 제국을 완전히 정복했고 총독까지 지냈지만, 가난하고 천대받는 빈민이 돼 최후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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