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마음은 의외로 사소한 부분에서 움직인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관객이 완전히 넘어간 건 스스와타리의 먹이로 별사탕이 뿌려지면서부터였고, <날아라 슈퍼보드>의 전설적인 시청률을 이뤄낸 건 조연에 불과했던 사오정의 엇박자였다. 아귀가 좀 맞지 않아도, 어딘지 어색해도 그냥 마음을 주기로 작정하게 만드는 어떤 것.
SicAF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이성강 감독의 단편 <오늘이>는 그 ‘어떤 것’이 유기체처럼 살아 숨쉬는 작품이다. <마리이야기>를 끝낸 감독이 어느새인가 조용히 만들어낸 16분짜리 2D애니메이션에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어떤 단서도 없다. 이 세상일지, 저 세상일지, 옛날인지, 요즘인지 모를, 아니 애초 구분도 필요없는 그런 곳이다.
궁중 병풍이나 자수에 등장할 법한 산과 바다 문양이 넘실대는 그곳에 작은 여자아이가 학과 여의주와 더불어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사실 이곳은 계절의 향기와 바람이 시작되는 원천강. 거기 살고 있는 작은 여자아이 ‘오늘이’가 도대체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들은 평화롭게 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무리의 어른들이 몰려와 엄마처럼 품어주던 학 ‘야’를 죽이고 오늘이를 잡아간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우리 인생이 아무 설명도 해주지 않는 것처럼. 이런저런 일을 겪고, 마침내 자유로워진 오늘이는 그때부터 원천강을 찾아 이곳저곳을 다닌다. 도중에 행복해지는 법을 알고 싶어 책만 읽어대는 안경 소녀도 만나고, 자기 뿌리에서 겨우 한 송이 꽃만 피는 것이 슬퍼서 우는 연뿌리도 만난다. 그뿐 아니다. 머리 위에 비가 내리는 구름을 달고 다니는 소년, 여의주를 수없이 모아도 승천이 안 되는 이무기…. 모두 오늘이에게는 신기한 존재들이다.
<오늘이>는 보는 순간부터 마음을 빼앗기는 작품이다. 먼저 아름다운 그림체. 전통적인 문양으로 구성된 산수와 색상은 압권이다. 박제되지 않은 생생한 색상과 화풍에서는 조선 후기 민화를, 이무기가 변한 용에서는 역시 민중의 자유로운 창작력이 생동하던 조선 후기 청화백자의 용 문양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보는 이를 한번에 사로잡는 <오늘이>의 매력은 이런 배경과 어울리지 않는 등장인물과 이야기 전개다. ‘전통과 현대의 절묘한 결합’ 하면 떠오르는 진중한 이미지의 선입견을 깨고, 등장인물의 행동거지는 가볍고 부담없다. 먼저 이들이 툭툭 내뱉는 대사가 살아 있다. 흐느끼는 연꽃을 보고 천연덕스럽게 높은 톤으로 “넌 왜 그렇게 구시렁대는 거니?” 하는 오늘이의 생생한 대사를 들으면 박장대소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모든 이의 예상을 깨고 안경 소녀와 구름 소년이 러브러브한 관계로 발전하는 장면에서는 정말 만만치 않은 저력을 느끼게 된다. 원일 음악감독의 음악은 또 어떤가!
<오늘이>에서는 신비로움과 흥이 함께 느껴진다. 전통과 현대가 이렇게 이어지는 것이구나, 납득하게 된다. 무엇보다 <오늘이>는 감독의 익은 손이 그간 세상살이를 통해 일궈낸 지혜를 버무려서 빚어낸 작품이다. 자기를 버리는 순간 행복해진다는, 세상과의 조화를 말하고 있지만 결코 강요하지 않는다. 빈틈없이 고안된 서사구조가 아니라 분청사기의 자유분방한 문양처럼 열린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보여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상상할 수 있다. 만든 사람이 노심초사하며 끝까지 지켜보지 않아도 저절로 자기 혼자 굴러가는 작품이다. 장인의 익은 손! 김일림/ 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 illim@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