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영화판 사람들의 전통적인 정서는 비즈니스적이라기보다 인간적인 관계의 소통을 더 중요시해왔다. 우리가 인간적이라 함은 언제나 모순된 두 얼굴의 양면성이 있다. 서로의 관계가 일이 잘될 때는 ‘인간적인’ 정서의 소통이 일종의 시너지를 생산하지만, 일이 잘 안 되고 뒤틀리기 시작하는 어느 지점부터는 ‘악마적인’ 인간의 전혀 다른 얼굴로 돌변해버린다. 그래서 어떤 일에 대한 시시비비보다는 서로에 대한 배신의 감정 때문에 몸서리를 치게 된다. 급기야 ‘인간적인’ 소통의 단절이 이루어지고, 법리적인 이해관계의 치열한 싸움으로 내닫게 된다. 합리와 이성보다는 감성이 더 소중하다고 자부해왔던 인간에 대한 믿음은 참혹하게 무너지고 만다.
최근 들어 제작자와 투자자간의 소송 시비가 심심찮게 생기고 있다. 어느 편에서 얘기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소송은 인간 자체의 부조리 때문에 생겨난 필연적으로 있어야 할 하나의 제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영화판에서 소송이 낯선 이유는 인간적인 정서의 전통 때문이다. ‘영화쟁이’라고 불리는 이유도 영화를 한다는 자체가 비즈니스라기보다 하나의 예술행위로 전제하기 때문이다. 한편의 영화가 제작되면서 이루어지는 계약 행위는 100여건이 훨씬 넘는다. 갑과 을의 수많은 관계가 형성되지만, 계약의 내용에 의해 100% 일이 진행되는 것을 누구도 잘 믿지 않는다. 으레 그러려니 하는 관습에 의해 진행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비즈니스의 엄격한 논리와 잣대로 일일이 들여다보면, 말이 안 되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한편의 영화는 끝까지 완성되어 성공하거나 실패한다. 이것은 그 자체의 시스템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하나의 논리로 꿸 수 없지만 반복적으로 생산되는 관습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문화’라고 본다.
사실 지금 영화판은 관습의 전근대성을 탈피하고, 전문화된 산업의 영역으로 급격하게 바뀌고 있다. 단일 영화사로 매출 1천억원을 넘는 시대가 왔다. 더이상 ‘영화판’이라고 불리는 것도 옛말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와 관련한 전문 법률서비스를 하는 변호사와 법무법인이 생겨났고, 웬만한 큰 계약에는 변호사가 참여한다. 그럼에도 제도가 먼저 생기고 인간이 뒤따르는 법은 없다. 제도는 항상 한발 뒤에서 따라온다. 그것은 ‘문화’라고 하는 인간의 의식이 함께 공유되어야만 제도는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영화판의 전근대성을 완전히 극복하기 위해서는 영화계 안팎의 ‘문화’가 바뀌고 모두에게 공유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 영화계는 아직은 변화의 과도기에 있다. 영화쟁이로서의 인간적인 정서의 문화가 비즈니스로서의 전문화된 산업의 문화로 바뀌는 데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본다.
일반적으로 갑과 을의 계약 행위가 있다면, 갑은 대개 기득권자다. 제작자와 투자자의 계약에서 당연히 투자자가 갑이다. 서로의 관계를 좋게 이야기하면 사업 파트너이지만, 사실은 제작자는 투자자에 종속된 하청업자다. 투자자가 어떤 영화에 투자를 하는 행위는 말이 투자이지 일반적으로 상품을 사는 것과 동일하다. 즉, 세금계산서를 발행하여 제작비를 미리 받고, 그 작품이 완성되면 납품을 하는 것이다. 다른 상품과 차이가 있다면, 만들어진 물품이 아니라 만들어질 물품의 가격을 미리 상정하여 사는 행위 때문이다. 그래서 선금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행위가 투자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다. 사실 투자자에게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예술 행위’로서의 정서를 요구하기엔 근본적으로 무리가 있다. 영화는 예술이기 이전에 상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작자에게 영화는 상품이기 이전에 예술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투자자가 살 수 있는 상품을 만들기 위해 어떤 작품을 개발하지만, 그 개발의 행위와 내용은 창작과 예술이기 때문이다.
제작자와 투자자간에 분쟁이 생기는 근본적인 이유는 서로의 입장과 행위의 다름을 이해하거나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입장과 동기는 다르지만, 공생해야만 하는 관계라면 서로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상도덕이다. 투자자가 어떤 상품을 사겠다고 해놓고 사지 않으면 그것은 사기이며, 제작자가 작품을 생산하기 위해 받은 돈으로 다른 데 썼다면 그것은 도둑질이나 다름없다. 투자자는 생존을 무릅쓰고 고군분투하는 제작자의 창작을 단순히 상품으로만 보지 말고 존중하기를 바라며, 제작자는 투자자의 돈을 자기 돈처럼 소중하게 쓸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제는 인간적인 정서에 호소하는 시대는 지났다. 철저히 비즈니스 마인드로 접근해야 하다. 하지만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돈이 아니라 도덕성이다. 관계의 비즈니스에서 도덕이 전제될 때, 한국영화의 미래와 전망이 있을 것이다. 이승재/ LJ필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