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Bunch, 1969년감독 샘 페킨파출연 윌리엄 홀덴 EBS 8월30일(토) 밤 10시
비평가 앙드레 바쟁은 서부극이라는 장르의 매력을 발견했던 사람이다. 그는 일찍이 “서부극은 영화의 기원과 거의 일치하는 유일한 장르이고 상업적 성공이 여전히 생생한 생명력을 유지하는 장르”라고 일갈했다. 서부극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감독은 존 포드다. 그의 <역마차>(1939)는 고전적 서부극의 완성을 알리는 작품이다. 미국적 신화에서 서부극 연출의 전통에 이르기까지 존 포드는 적지 않은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시대는 변하는 법. 바쟁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서부극이 장르적으로 진화하였음을 논한 적 있다. 그는 앤서니 만, 로버트 올드리치 등의 영화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런데 서부극의 진짜 변화는 이후에 가능했다. 샘 페킨파 감독이 수정주의 서부극의 시대를 연 것이다.
샘 페킨파는 (방영제목은 이렇고 영화 원제는 <와일드 번치>다. 편의상, 그리고 다른 영화서적에 소개된 것처럼 이후 <와일드 번치>로 표기)를 완성한 뒤 기자들과 인터뷰한 적이 있다. 어느 여성 저널리스트가 이렇게 물었다. “영화에 왜 이렇게 많은 피가 나오죠?” 배우 중 한사람인 어니스트 보그나인은 답했다. “레이디, 사람이 얻어맞으면… 피를 흘리는 것이랍니다.” 당시의 비평가들은 총싸움과 혈투가 난무하는 영화를 보면서 베트남전쟁으로 얼룩진 미국사회의 자화상을 발견했다. 폭력에 중독된 현실을 깨달은 것이다. 영화 도입부는 심상치 않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개미떼의 먹잇감이 된 전갈을 보면서 웃는다. 아이들은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킬킬댄다. 파이크 일당은 텍사스의 철도사무소를 강탈하기 위해 찾아온다. 그런데 한때 동료였던 손튼이 파이크 일당을 맞이한다. 파이크는 멕시코로 줄행랑을 친다. 멕시코에선 독재자와 민간 혁명군이 대치하고 있고 파이크 일당은 이들 사이에서 다시 총격을 벌이게 된다. <와일드 번치>는 카메라의 움직임, 편집 기교가 대단하다. 거친 서부의 남자들이 액션을 벌이는 현장을 사실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편집은 총격전이 벌어지는 장면에서 초단위로 장면을 끊으면서 극의 역동성을 살리고 있다. 어느 해외 비평가는 “폭력을 이렇듯 공포스럽고 직접적으로 묘사한 영화는 없었다”라며 감탄할 정도다. <와일드 번치>가 이전 서부극과 궤를 달리하는 것은 캐릭터에서도 잘 드러난다. 영화 속 서부의 사나이들은 대의보다 현실적 이득에 매료되며 영웅보다 무법자, 시대에 뒤떨어진 반영웅에 근접한다. 또한 개인주의 냄새를 물씬 풍긴다. 이렇듯 퇴락했으며 공동체와 불편한 관계에 놓인 반영웅의 이야기는 이후 오우삼이나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로 계승되었다.
샘 페킨파 감독의 영화들은 기복이 심한 편이다. 서부극인 <와일드 번치>나 <관계의 종말> 등은 수작이었지만 드라마에 도전했을 때는 영화의 수준이 오락가락했다. 액션영화인 <게터웨이>가 그나마 다른 장르에서 샘 페킨파 감독이 솜씨를 발휘한 경우다. 샘 페킨파는 서부극의 새로운 시대를 알린 감독이었지만 현대 ‘폭력영화’의 대부라는 낙인을 좀처럼 벗지 못했다. 그것은 찬사이자 영화감독으로선 고통스런 멍에 같은 것이었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garota@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