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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복 감독과 <영매> [1]

기록영화 10년 박기복 감독의 한과 <영매> 사랑

지난해 인디다큐페스티벌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관객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던 다큐멘터리 <영매>가 정식으로 극장 개봉한다. 한국 무속의 전통에 어떤 종교 못지않은 성스러움이 깃들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영매>는 <우리는 전사가 아니다> <냅둬> 등으로 알려진 다큐멘터리 작가 박기복 감독이 연출한 작품. 상영관은 대학로에 있는 하이퍼텍 나다 한 군데이며 개봉일은 9월5일이다.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 연작 이후 오랜만에 정식 개봉관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날 기회다.

개봉이 확정되자 박기복 감독은 감격을 감추지 못하며 <씨네21>에 한통의 편지(혹은 호소문)를 썼다. <씨네21> 독자들을 <영매>의 관객으로 만나고 싶다는 바람이 담긴 이 편지는 다큐멘터리 작가로 살아가는 일의 고단함과 희열을 전달하는 글이다. 박기복 감독의 편지와 함께 무속에 정통한 비교종교사 연구자 김장호씨가 쓴 <영매> 관람기를 함께 싣는다. - 편집자

是日也靈媒興行放聲大願 (시일야영매흥행방성대원)

어느 다큐 감독이 보내는 편지 - 이 날에 목놓아 영매의 흥행을 기원한다

박기복/ <우리는 전사가 아니다> <냅둬> <영매> 감독

제가 푸른영상에 들어가서 <우리는 전사가 아니다>를 완성한 것이 1994년이니 올해로 기록영화를 시작한 지 꼭 10년째가 됩니다. 옛 어른들은 매사 한우물을 십년 파다보면 뭔가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글쎄요 길이 보이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한우물 10년 판 덕에 비로소 제 영화를 극장에 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전사가 아니다>를 완성하면서부터 제 꿈은 제가 만든 기록영화를 극장 개봉하는 것이었고 또 기록영화로 흥행을 한번 해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오매불망이었으니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 10년 된 사연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경향각지의 국민 여러분!

저는 여전히 영화는 ‘기록’과 ‘극’의 양 날개로 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잘 가꾸어진 정원이나 인공의 숲도 즐겨합니다만 그래도 자연 그대로인 천연의 숲에 대한 몸의 갈증은 있게 마련입니다. 다큐멘터리는 바로 팩트(사실)들로 이루어진 ‘우아한 진실’의 세계이지요. 오해하시지는 말기 바랍니다. 비극도 절정에 이르면 우아한 법이니까요. 여러분도 아마 한국영화가 인공의 숲으로만 뒤덮이기를 바라지는 않으실 겁니다. 한국영화의 풍경이 좀더 풍부한 질감으로 가꾸어지기를 내심 바라실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과연 여러분들은 기록영화를 극장에서 접한 기억이 있으십니까? 여러분들은 ‘한국 기록영화사’란 담론의 장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나라 국가대표 영화제인 대종상영화제에서 기록영화 감독이나 스탭들의 얼굴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은 아마 아카데미영화제에서 부시에게 똥침을 먹인 마이클 무어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셨겠지만 한국에서는 어림없는 일입니다.

국민 여러분! 저는 아마 영화가 관객과 극장에서 소통하지 못하고 비디오나 인터넷을 통해서 아주 사적인 공간에서만 유통된다면 이렇게 영화에 삶을 바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관객이기도 한 여러분의 생각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대중교통도 끊긴 심야 시간에 좋아하는 영화를 찾아서 극장을 가득 메우는 여러분들을 볼 때마다 저는 제 생각의 보편성을 확인하곤 합니다. 여러분들이 왜 조금 기다렸다가 비디오로 빌려보셔도 될 일을 그 번거로운 수고를 마다않고 늦은 시간에 극장을 찾으시겠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열린 마당의 매혹과 집단성의 미학 때문 아니겠습니까? 극장은 이름도 없이 뷰유하는 대중을 한데 묶는 마법의 공간입니다.

관객은 그 마법의 공간에서 함께 울고 웃으며 집단적 정서의 매혹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름없이 부유하던 대중에게는 마약과도 같은 황홀입니다. 저마다 생선의 비늘처럼 서로 갈라졌던 일상들 아니었겠습니까? 영화 하는 사람들은 누더기처럼 찢어졌던 여러 일상들이 모여 근사한 한벌의 비단옷이 되는 그 황홀의 원천이 바로 자신의 작품이라는 사실에서 지극한 행복을 맛보는 것입니다. 지난 10년 동안 거리를 누비며 홈리스들과 같은 밥을 먹고 자면서도 혹은 허름한 여인숙에서 부랑아들과 칼잠을 자면서도 저를 지탱해주었던 것은 바로 극장의 그리움과 집단적 정서의 매혹이었습니다. 따라서 극장에서 관객과의 집단적 소통 불가능이란 영화감독에게는 사형선고입니다. 관객이기도 한 국민 여러분들에게는 아마 무기징역쯤 되겠지요. 구류 정도도 안 된다구요? 아니지 않습니까? 앞서 말씀드렸듯이 여러분 또한 팩트들이 만들어내는 우아한 천연의 숲을 혼자가 아닌 친구들과 혹인 애인과 함께 거닐고 싶지 않습니까? 단절된 사적인 공간이 아닌 열린 축제의 마당에서 말입니다.

혹시 여러분께서는 흥행될 수 있는 작품을 만들면 될 것 아니냐고 반문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남의 탓만 하는 파렴치한 아니냐고 말입니다. 하지만 기록영화를 극장에 건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로 치부되는 현실 속에서 그 어떤 영화의 발전을 기대하겠습니까? 배우가 연극에 목숨을 거는 것은 무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영화의 무대는 극장입니다. 저희는 그동안 말하자면 무대를 빼앗긴 배우였고 굿판을 빼앗긴 무당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영화 역사가나 평론가들은 ‘한국 기록영화사’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언어도단이라고 자기들끼리 합의한 모양입니다. 게다가 지금까지 한국 기록영화에는 양식의 역사조차 찾아볼 길 없다고 배에 힘주는 평론가도 있는 마당이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오호 통재라! 우리는 그렇게 한국영화 100년 이래 근본도 없는 어둠의 자식들로 버림받았던 것입니다.

<영매>와 관련해서 어느 일간지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담당 기자분이 저를 ‘한국 다큐 2세대’라고 불렀습니다. 사실 푸른영상의 김동원 감독을 염두에 둔 세대 구분이지만 그분하고 나이 차이는 10년, 더구나 <상계동 올림픽>과 <우리는 전사가 아니다>의 작품 터울은 5∼6년밖에 되질 않으니 세대 구분에 좀 무리가 있을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흔쾌히 저를 2세대 감독이라고 불러달라고 했습니다. 내심 ‘아, 한국 기록영화도 이제 세대와 역사가 언급되나보다’ 하는 감격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날 늦게까지 인터뷰를 끝내고 정동 언덕을 내려오면서 소년처럼 가슴 설렜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국민 여러분!

이렇듯 한국 기록영화는 이제 시작인 것입니다. 지나가다 어린 새싹이 땡볕에 말라가고 있으면 그 어린 생명의 비명이 들리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디 물이라도 한 바가지 떠다주고 싶은 것이 우리네 인심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이쯤에서 <영매>란 작품에 관해 약간의 언급이 필요하겠습니다. ‘도대체 어떤 작품이기에 당사자가 이리 자기 작품 봐달라고 떼를 쓰는가? 어디 내막이나 한번 들어보자’란 심정이시겠지요. 다큐멘터리 <영매>에는 문화 인류학적인 시선과 타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의탁하는 한국적 사유의 풍경이 있다고들 합니다만 저는 이 자리에서 <영매>를 가족과 기억의 상처(혹은 한)를 되돌아보게 하는 영화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가족과 기억의 상처’란 테마는 매우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코드가 아닐는지요? 저는 바로 이 지점에서 관객이기도 한 여러분과 <영매>가 충분히 교감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제 영화를 본 여러분들의 평론과 감상 중에서 가장 제 맘속에 각인된 것이 있습니다. 전해 들은 말입니다만 20대 후반의 어느 여성이었다지요.

그분이 <영매>를 본 뒤 “어머 얘, 이제부터라도 부모님한테 효도해야겠다”라고 했답니다. 사실 <영매> 촬영을 하면서부터 제 마음이 그랬던 것입니다. 굿이란 것이 결국 살아서 못 푼 가족의 한을 죽어서라도 풀기 위한 산 자의 몸짓이 아닐는지요? 그러니 그 한과 눈물의 굿판을 3년여 돌아다녔던 제 맘이 오죽했겠습니까? 어느 날 제가 어머니께 그랬습니다. “어머니 제발 우리 이제 싸우지 맙시다. 어머니 돌아가시면 아주 사소한 것들도 제게는 다 한이 될 것 같아요. 어머니 제발 저에게 한이 될 거리를 만들어주지 마세요. 저도 많이 노력하겠습니다.” 하지만 가족끼리 부대끼다보면 또 어찌 서로 얼굴 붉힐 일이 없겠습니까? 집에 오신 어머니와 한번 갈등이 있었지요. 어머니는 화나고 억울하셨는지 눈물을 보이시곤 집을 나가셨지요. 전 막내아들 때문에 어디선가 방황하고 계실 어머니 때문에 애가 닳았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휴대폰으로 전화를 드렸습니다. “어머니 무조건 제가 잘못했습니다. 어머니를 화나게 하고 슬프게 한 것만으로도 제가 무조건 잘못한 일입니다.” 그 말씀을 드린 지 얼마 안 돼서 어머니는 소리도 없이 다시 제 집으로 오셨습니다. 물론 어머니의 화는 눈 녹듯이 풀리고 난 뒤였습니다. <영매>는 그렇게 감독인 제 자신부터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여러분께 좀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각고의 노력을 한 <영매>가 드디어 극장 개봉을 이루었습니다. 당연히 저는 좀더 편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여러분의 축하를 받아야만 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왜 행복해야 할 제 마음이 이리 편치가 않은 것일까요? 내막은 이렇습니다. 여러분들과 한판 멋들어지게 놀아야 할 굿판이 너무 빈약하고 초라하기 때문이니 <영매>의 전국 개봉관이 고작 1개관인 것입니다. 그야말로 서글프기 짝이 없어 다큐멘터리 신(神)도 노여워할 형편입니다. 그러니 다큐멘터리 신을 몸주로 받은 이 박수무당의 마음이 오죽 애가 닳겠습니까? 좀더 그럴듯한 굿판을 마련해보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아닐는지요? 그렇다고 제가 설마 관객 수 10만, 20만명을 바라겠습니끼? 저도 세상 물정은 아는 사람입니다. 제작자인 영화 음악하는 조성우 선배와 그랬습니다. 1만명이면 초흥행, 2만명이면 대박, 3만명이면 초대박이라고 말입니다. 세상에 툭하면 몇 백만 넘어가는 영화들이 많은데 고작 3만명에 초대박 운운하는 저희들이 어처구니라구요? 시장의 칼바람은 매서운 것입니다. 이번에 <영매> 개봉관 담당자가 3주 걸고 잡은 최대 관객이 몇명인 줄 아십니까? 4천명입니다. 150석이 안 되는 좌석 수에 좌석점유율(아침부터 밤까지 평균)을 계산해보시면 대충 이해는 가실 것입니다.

오호 통재라! 아무리 시장의 칼바람이 매섭다고는 하나 제작기간 3년에 후반작업비, 마케팅비 다 포함하면 1억5천만원이 넘는 영화가 고작 4천명이면 전국적인 흥행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왜냐고요? 우리에겐 메인 극장의 스코어가 전국 스코어인 것입니다!

하지만 국민 여러분! 제가 여러분 대신 전국을 돌아다니며 모아놓은 굿만 보셔도 극장표값이 아깝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교통비, 숙박비, 식대 포함해서 그 굿 다 보시려면 아마 기백만원은 족히 들 것입니다. 게다가 돈이 있어도 볼 수 없는 굿이 대부분입니다. 팩트들로 이루어진 우아한 천연의 숲을 친구들과 혹은 애인과 함께 거닐고 싶어하는 여러분! 이 다큐멘터리 무당의 10년 된 한과 한국 다큐멘터리 신의 노여움을 풀어주시는 것은 오직 여러분들 손에 달린 것입니다.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150석 안되는 좌석을 꽉꽉 메워주셔서 좌석점유율을 높여주시는 것이지요. 저에게 박스오피스 순위권 진입은 언감생심입니다. 그렇다면 무얼 바라겠습니까? 바로 ‘전국 극장 좌석점유율 1위’ 입니다. 국민 여러분! 메워야 할 좌석 수가 고작 150석 아니겠습니까? 말하자면 조그만 시골 학교에서 전교 일등 한번 해보자는 것입니다. 그것도 내신 일등급이긴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배급시장에서 티켓 파워를 보여주신다면 그것은 곧 시장을 설득해 확대 개봉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1개관 4천명이 10개관이면 4만명인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저희랑 한번 해볼 만한 도전 아니겠습니까?

국민 여러분!

굿판은 차려졌습니다. 이제는 여러분이 굿판의 주인입니다. 다큐멘터리 무당과 한국 다큐멘터리 신의 한을 푸는 해원의 신칼은 이제 여러분 손에 쥐어진 것입니다!

어서들 손에 손잡고 오셔서 영화를 보시며 부모에 대한 효심과 형제간 우애를 발원하시고 덤으로 한국적 사유와 죽음의 의례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한국 기록영화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목격한 역사의 증인이 되시는 것입니다.

경향각지의 국민 여러분!

대붕은 한번 지축을 박차면 구만리 장천을 날아오른다고 합니다. 그처럼 한국영화가 기록과 극의 양 날개로 힘차게 반도를 비행하는 그 화엄의 순간이 어쩌면 여러분 생전에 가능할지도 모를 일입니다.편집 심은하 eunhasoo@hani.co.kr

▶ 박기복 감독과 <영매> [1]

▶ 박기복 감독과 <영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