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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VD 연속기획 최종 - 옛날 괴물 8選
김혜리 2003-08-22

옛날 옛적 원초적 공포 속으로, 우오오~드라큘라, 프랑켄슈타인, 늑대인간, 좀비, 미라, 외게괴수의 원조를 만난다

드라큘라, 프랑켄슈타인, 늑대인간, 좀비, 미라, 외계괴수…. 출신 배경도 다르고 기원도 다른 이들 괴물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그건 아마 모두 ‘영화스타’란 점이리라. 이들 괴물들은 사람들의 입과 소설책, 연극무대 등에도 깃들었지만, 최고의 대우를 누린 곳은 스크린이었다. 상상 속에만 머물거나 제한된 표현으로만 보여지던 괴물들은, 영화에서 비로소 특수효과와 분장 등의 힘을 입어 그 무시무시한 형체를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어두운 극장 안에서 괴물과 맞닥뜨리는 공포를 어디에 비교하랴. 하지만 공포에도 원조가 있는 법. DVD 시대를 맞아 속속 등장하고 있는 이들 ‘옛날 괴물’은 공포효과로 따지면 요즘의 괴물들에 비해 싱겁기 짝이 없지만, 괴물의 원초적이며 근원적인 모습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때론 피식 웃음이 나오고, 때론 가슴도 졸이게 하는 원조 괴물들과의 조우. - 편집자

<플라이>

저주받은 유전자의 원형

The Fly | 1968년 | 컬러 | 94분 | 감독 커트 뉴만 | 출연 알 헤디슨, 패트리샤 오언스, 빈센트 프라이스 | 출시 이십세기 폭스 홈엔터테인먼트

인류를 향한 분노와 살육 본능으로 피가 끓는 여타 살벌한 변종 괴물들과 사뭇 다르게, <플라이>의 파리 인간을 가장 두려워하고 혐오하는 것은 파리 인간 그 자신이다. 그런 의미에서 ‘플라이’는 앨리게이터보다 정체성 위기를 겪는 엘리펀트맨이나 다크맨과 더 가까운 혈족인지도 모른다. <플레이보이>에 실렸던 단편을 각색한 커트 뉴만 감독의 1958년작 <플라이>는 <돌아온 플라이>(1959), <플라이의 저주>(1965)의 두 속편과 1986년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리메이크, 그리고 리메이크의 속편 <플라이2>(1989)까지 이어진 저주받은 유전자의 원형이다.

인쇄공장 프레스기에서 과학자 안드레 델람버의 두개골이 으깨진 시체가 발견된다. 안드레의 형 프랑수아 델람버와 경찰은 자신이 남편을 죽였다고 침착하게 주장하는 헬렌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여기지만, 헬렌은 전도양양한 과학자였던 사랑하는 남편에게 닥친 몸서리쳐지는 비극을 회고한다. 1986년판 <플라이>의 매끈한 논리와 점액질 공포를 기억하는 관객에게, 오리지널 <플라이>는 김빠진 맥주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파리와 머리가 바뀐 주인공의 지능과 기억력은 희한하게도 그대로다). 과연 <플라이>는 1950년대 공포영화가 흔히 그렇듯 매우 산문적이고 세트와 연기는 고전 멜로드라마와 혼동될 만큼 단정하다. 그러나 부족한 리듬감을 보완하고 남을 만한 세련된 극적 매무새와 원초적 공포가 살아 있다. 안드레는 과대망상증을 앓는 미치광이라기보다 탐구에 몰두한 프로페셔널로 수긍이 갈 만한 인물로 그려진다. 언뜻 암시되는 헬렌에 대한 프랑수아의 감정은 이 SF를 동생의 아내를 연모한 사나이의 슬프게 뒤틀린 판타지로 읽도록 부추기기도 한다. 몸뚱이를 잃고 울음소리만 떠도는 고양이, 겁에 질린 아내를 파리의 시점으로 바라본 숏, 주인공의 충격적인(!) 마지막 모습은 조악한 특수효과에 실소하면서도 “살아 있는 한 그 비명을 잊지 못할 것”이라는 대사에 공감하게 만드는 저력이 있다.

<프랑켄슈타인의 저주>

물불을 가리지 않는 차가운 피

The Curse of Frankenstein | 1957년 | 컬러 | 83분 | 감독 테렌스 피셔 | 출연 피터 쿠싱, 크리스토퍼 리 | 출시 워너브러더스코리아

1950년대 말 영국의 해머프로덕션이 호러 장르에 관심을 갖기 전까지 영화 속 프랑켄슈타인과 드라큘라는 흑백 괴물이었다. 1930년대 할리우드의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의해 은막에 초대됐던 고딕소설 속 몬스터들은 핵실험 부작용이 낳은 신종 괴물들에게 자리를 빼앗기고 한동안 잠에 빠졌기 때문이다. 해머 호러의 실질적인 ‘작품 번호 1번’인 <프랑켄슈타인의 저주>(1957)는, 1960년대 미국 영화계의 고딕호러 부활을 촉진하고 로저 코먼이 만든 에드거 앨런 포 원작 영화에까지 입김을 불어넣은 해머 호러의 원형을 보여준다.

뒷날 해머프로덕션의 지주가 되는 테렌스 피셔 감독과 배우 피터 쿠싱, 크리스토퍼 리가 첫 번째 트리오를 선보이는 <프랑켄슈타인의 저주>는 사형수 독방에서 프랑켄슈타인 남작이 털어놓는 고백을 긴 플래시백으로 재연하는 형식을 취한다. 이 영화에서 제임스 웨일 감독의 1931년작에서 심금을 울렸던 괴물을 향한 강렬한 연민은 매몰차게 배제된다. 대신 테렌스 피셔가 주목하는 것은 실험의 성공을 위해 일말의 갈등도 없이 인간 육체의 존엄성을 능욕하고 악행의 강도를 높여가는 프랑켄슈타인 남작의 파충류적 냉혹함이다(<프랑켄슈타인의 저주>에서 가장 징그러운 이미지가 크리스토퍼 리의 누덕누덕 기운 얼굴이 아니라 도려낸 안구를 관찰하느라 확대경 앞에 앉은 남작의 왜곡된 이목구비이다). 이러한 차이는 유니버설의 프랑켄슈타인 시리즈를 지속적으로 끌어간 캐릭터가 프랑켄슈타인의 흉측한 피조물이었던 것과 달리 해머판 프랑켄슈타인 연작의 주축은 프랑켄슈타인 남작이었다는 사실로도 확인된다. 메리 셸리가 쓴 원작소설의 메시지였던 인간의 교만을 꾸짖는 종교적 경고도 <프랑켄슈타인의 저주>에서는 희미하다. 그보다 제자의 타락에 경악하는 가정교사, ‘혼인빙자 간음’의 희생물이 되는 하녀, 고해를 외면하려는 신부 등 주변인물을 통해 부각되는 주제는, 목적 앞에 물불을 가리지 않는 악 앞에서 절제와 매너가 지배해온 사회가 전율하는 광경이다. DVD 화면이 선명히 드러내는 버나드 로빈슨의 미술은 독일 표현주의 풍을 벗어던지고 노골적 묘사와 생생한 컬러를 선택한 해머의 도발전략을 실감케 한다.

<이블 헌터>

죽음의 얼굴, 문명의 일그러진 얼굴

Dawn of the Dead | 1978년 | 감독 조지 로메로 | 출연 데이비드 엠지, 켄 포리

만약 ‘죽음’에 얼굴이 있다면, 정말로 좀비의 얼굴처럼 끔찍한 것일까? 클라이브 바커는 ‘좀비는 죽음의 구체적인 얼굴을 뜻한다’고 말한다. <이블 헌터>나 같은 영화에서 보는 것은 분명, 이성과 도덕이 사라진 뒤 맞닥뜨리는 죽음의 얼굴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좀비가 사람의 살을 뜯어먹고, 물린 사람을 다시 좀비로 변형시키는 초자연적인 괴물은 아니었다. 원래의 좀비는 카리브해 지역의 원시종교 부두교의 무당들이 만들어낸 ‘시체 같은 사람’을 말한다. 무당은 저주를 걸어 제정신을 잃어버리게 하거나, 이상한 약물을 먹여 사리판단을 못하게 만들어 멀쩡한 사람을 노예로 부린다고 한다. 1932년의 <화이트 좀비>, 1943년의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 등의 고전 공포영화에서는 무당의 저주 때문에 살아 있는 시체가 된 좀비가 나온다. 하지만 1968년에 만들어진 조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좀비는 무지막지한 괴물로 각인된다. <이블 헌터>는 조지 로메로의 좀비 삼부작 중에서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 이어지는 두 번째 작품이다. 묘지에서 걸어나온 좀비들은 만난 사람들을 먹어치우거나 좀비로 만들어버리면서 도시로 향한다. <이블 헌터>의 무대는 거대한 쇼핑몰이다. 좀비의 공격에서 겨우 살아남은 스티븐 일행은 쇼핑몰에 거처를 정하지만, 그곳 역시 안전하지 못하다. 온갖 상품들로 가득한 쇼핑몰을 거니는 좀비들의 모습은, 상품의 마력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풍자한다. 그런 좀비를 무참하게 짓밟아버리는 폭주족들의 모습 역시 잔인한 우리의 자화상이다. <이블 헌터>는 죽음의 얼굴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문명의 일그러진 얼굴까지 참혹하게 그려낸다. 세 번째 작품인 <죽음의 날>에서 마지막 생존자들은 지하 벙커에서 자신들만의 안일을 꿈꾸는 군인들이다. 조지 로메로는 좀비 삼부작을 통하여 신랄한 문명 비판을 토해낸다. 혹시 좀비 삼부작의 훌륭함에 경의를 표하기는 하지만, 너무 무겁다고 생각한다면 <바탈리안>을 권한다. 혹은 피터 잭슨의 걸작 <데드 얼라이브>나. 그냥 즐겁게 웃으면서 좀비들의 활약을 만날 수 있다.

<미이라>

투탕카멘의 저주

The Mummy | 932년 | 감독 칼 프로인트 | 출연 보리스 카를로프, 지타 요한

<미이라>가 만들어진 것은 1932년, 영국인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가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견한 1922년에서 10년이 흐른 뒤였다. 투탕카멘의 무덤이 발견된 뒤 카터의 후원자였던 카나번 경을 비롯하여 발굴에 관련된 10여명이 죽어갔다. 하워드 카터는 천수를 누리며 1939년에 죽었지만, 세간에서는 ‘미라의 저주’란 소문이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미이라>가 만들어진 시점은, 그렇게 투탕카멘의 저주가 대중에게 널리 퍼져 있을 때였다. 당시 스타로 떠오른 보리스 카를로프를 위한 영화를 찾고 있던 유니버설은 당연하게도 미라의 저주를 선택했다. 수천년의 세월만에 부활한, 주름이 가득한 미라 역에 카를로프만한 배우는 없었다. <미이라>는 이전 유니버설이 만들었던 <드라큘라>나 <프랑켄슈타인>과는 다른 독특한 공포영화였다. 제사장인 임호텝은 죽은 아낙수나문을 되살리기 위하여 토트의 두루마리를 훔쳤다가 산채로 미라가 되는 형벌을 받는다. 발굴대원이 무심코 읽은 주문 덕분에 부활한 미라 임호텝은 수천년 전 사랑했던 아낙수나문을 부활시키려 한다. 영겁의 세월을 넘어 부활한 미라의 목적은 단 하나, 잃어버린 사랑인 것이다. 그러나 환생을 거듭하여 헬렌의 몸에 들어 있던 아낙수나문의 영혼은, 자신의 몸을 버리고 부활하는 길을 거부한다. 이 세상에서라도 살고 싶다, 고 말한다.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지만 여전히 미라인 임호텝과 살아 있는 인간의 육체를 지니고 있는 아낙수나문은 화합하지 못한다. 사랑의 불멸성은, 육체의 힘 앞에서 허무하게 사그라진다. 1999년 부활한 <미이라>는 여전히 임호텝과 아낙수나문의 사랑을 그리지만, 그 이외에는 모두 바뀐 모험영화가 되었다. 부활한 <미이라>의 최대 장점은, 신비의 상징이었던 고대 이집트의 풍경을 생생하게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오리지널 <미이라>에서는 모래와 벽돌말고는 이집트를 제대로 느낄 수가 없다. 하지만 보리스 카를로프라는, 카리스마 넘치는 배우를 위한 영화임에도 철저하게 압축과 생략으로 미라의 공포를 그려낸 칼 프로인트의 고집은 지금 보아도 즐겁다.

<드라큐라>

결코 죽지 않는 악의 씨앗

Dracula | 1931년 | 감독 토드 브라우닝 | 출연 벨라 루고시 | 출시사 유니버설

1897년 브람 스토커가 소설 <드라큐라>를 쓰기 이전부터 흡혈괴물은 전설 속의 단골손님이었다. 피를 생명에 비유하는 기독교 문명의 영향이 아니더라도, 인간의 피를 빨아먹고 살아가는 괴물은 사람들의 공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브람 스토커판 <드라큐라>의 특징은 이러한 전설 속의 괴인을 늑대인간 설화와 결합한 점이다. 드라큐라에게 물린 존재 또한 흡혈귀로 변한다는 설정이나 뱀파이어가 때론 박쥐로, 때론 늑대로 변신한다는 주장 등은 스토커의 창조적 발상인 것이다.

이러한 브람 스토커의 원작이 현대에 와서 뱀파이어에 관한 이야기 중 ‘정설’로 받아들여지게 된 데는 1931년작 <드라큐라>의 영향이 가장 컸다. 이 원작은 이미 런던과 브로드웨이의 무대로 옮겨져 인기를 얻고 있었으며, 영화로는 1921년 헝가리에서 <드라큘라의 죽음>으로, 다음해엔 F. W.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로 만들어졌지만, 어떤 작품도 유니버설의 <드라큐라>만큼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한 영국인의 도움으로 트란실베니아에서 영국의 한 지방으로 이주한 뒤 아름다운 여인들을 자신의 노예로 만든다는 드라큘라 백작의 이야기는 소설의 골격을 쇼킹하게 간추린 연극 대본에 기반하고 있지만, <드라큐라>가 뿜어낸 공포는 당시의 상상력을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드라큐라>에 대한 선풍적인 반응에는 무엇보다 드라큐라 백작 역을 맡은 벨라 루고시의 존재가 있었다. 헝가리의 정치적 변란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뒤 브로드웨이판 <드라큐라>에서 주연을 맡았고, 이 인기를 바탕으로 영화에까지 진출한 그는 기묘한 눈빛과 특유의 억양으로 관객의 전율을 이끌어냈다. 흡혈과 섹스의 상관관계 탓인지 루고시 본연의 매력 때문인지 그는 여성 관객의 뜨거운 눈길을 받았고, 남성들로부턴 경계의 눈초리를 받았다. ‘최초의 호러영화 스타’로 불리는 그는 이후에도 드라큘라 역이나 이와 유사한 배역을 계속 맡았지만, 너무 한 방향으로 밀어붙인 탓에 금세 스타덤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쓸쓸한 말년, 루고시는 “내게 드라큘라는 축복이며 저주다. 그는 (내 안에서) 결코 죽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어쩌면 루고시는 드라큘라의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지도 모른다.

<늑대인간>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The Wolf Man | 1941년 | 감독 조지 와그너 | 출연 론 채니 2세, 클로드 레인스, 워런 윌리엄 | 출시사 유니버설

래리 톨벳은 18년 만에 고향인 영국의 한 지방으로 귀향한다. 아버지의 불화로 집을 나갔지만 형의 돌연한 죽음으로 돌아온 그는 그웬이라는 아름다운 아가씨에게 한눈에 반한다. 점을 보기 위해 그웬, 그녀의 친구 제니와 함께 집시 마을을 찾은 래리는 늑대가 제니를 공격하는 모습을 보고 싸움 끝에 늑대를 죽인다. 하지만 다음날 목에 커다란 이빨 자국이 난 제니의 시체와 함께 발견된 시신은 늑대의 것이 아니라 한 집시의 것이었다. 늑대와의 격투 도중 입은 상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지만, 그에게선 이상한 징후가 느껴진다.

늑대인간 전설은 서구에선 오래전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돼왔다. 빨간 모자 이야기나 뱀파이어 이야기 또한 늑대인간과 깊은 관련이 있다. 빅토리아 시대 들어 몸에 털이 많은 사람을 ‘늑대인간’이라 부르며 전시하는 서커스 공연이 등장했으며, 다윈의 진화론과 늑대와 함께 살았던 소년에 대한 이야기 등은 늑대인간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 늑대인간은 원시와 과학의 대립항 사이를 잇는 네안데르탈인 같은 존재로 받아들여졌는지도 모른다.

이런 점이 아니더라도 1941년작 <늑대인간>은 매우 흥미로운 텍스트다. 영화는 첫머리부터 늑대인간 현상은 스스로를 늑대라고 착각하는 정신병의 일종인 ‘낭광’(狼狂)에서 비롯된다는 과학적 분석으로 출발한다. 훗날 늑대인간으로 변신하는 래리는 기계를 잘 다루는 과학과 문명의 수혜자이며, 아버지는 저명한 과학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과학과 원시, 선과 악, 옳고 그름의 구분은 모호해지고, 인간의 내면과 외면 또한 혼재되기 십상이다. 특정한 순간 늑대인간은 다른 이를 해치지만, 자신의 뜻에 따른 것이 아니다. 이 통제할 수 없는 살의를 비관한다 해도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때문에 늑대인간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해치고, 스스로의 의지대로 죽을 수도 없는 슬픈 괴물이다. 여기엔 나치 시대를 살았던 시나리오 작가 커트 시오드막의 체험이 녹아 있을 것. 늑대인간은 호러영화 역사에서 최초의 죄없는 희생양 괴물로 기록된다.

보이지 않는 공포, 볼 수 있는 공포

13 Ghosts | 1960년 | 감독 윌리엄 캐슬 | 출연 찰스 허버트, 조 모로, 마틴 밀너 | 출시사 콜럼비아

윌리엄 캐슬은 감독으로서의 능력보다 쇼 비즈니스맨의 자질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스크린 위에 실제 해골을 보여주거나 극장 좌석 밑에 전기 장치를 설치해 관객을 놀라게 하는 등 다양한 수법을 사용하는 비상한 재주를 발휘했다. 그런 캐슬이다보니 영화를 보던 관객이 갑자기 앰뷸런스에 실려나간다거나 ‘괴성부대’를 배치했다는 이야기 정도는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 다소 평범해 보이는 유령 이야기인 를 위해 캐슬은 새로운 장치를 개발했다. 그는 이 영화가 ‘일루전-O’라는 특수기법에 의해 제작됐다면서 입장하는 관객에게 붉은색과 푸른색의 셀로판지가 붙어 있는 ‘유령감지안경’을 나눠줬다. 특정 장면에서 붉은색으로 보면 유령이 보이는데, 푸른색으로 보면 유령이 안 보이는 특수효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에게 영화는 예술이라기보다 하나의 이벤트였지만, 유령이라는 괴물이 ‘보이지 않는 공포’와 ‘볼 수 있는 공포’라는 두 가지의 무서움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는 본질만큼은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유령은 형체가 없으나 실체는 존재하는 탓에 만나는 것도 무섭지만, 보이지 않는데도 실제로 존재한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면 더욱 공포스러워지는 것이다.

12명의 유령과 함께 에서 또 하나 공포의 초점은 바로 집이다. 그리스 혈통의 조르바 가족은 가구도 저당잡힐 정도로 어려운 생활을 하다 소리 소문없이 사망한 삼촌으로부터 유산을 물려받는데, 그것이 바로 오래된 저택이다. 가족은 이 집에서 새로운 출발을 꿈꾸지만, 갖가지 유령들이 튀어나와 괴롭히는 통에 도저히 삶을 꾸려갈 수가 없다. 이미 캐슬 자신이 1959년작 <하우스 온 더 헌티드 힐>에서 선보인 것과 같이 고택은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유령이 될 수 있다. 미치광이 과학자인 삼촌의 광기와 유령들의 원한이 곳곳에 묻어 있으며, 안온함을 바라는 가족들의 소박한 욕망과 숨겨진 거액을 찾으려는 변호사의 탐욕이 한데 뭉쳐진 이 집은 갖가지 표정을 보여주며 배경 이상의 역할을 한다.

<우주의 침입자>

감정도 느낌도 없는 시스템의 노예

Invasion of The Body Snatchers | 1978년 | 감독 필립 카우프만 | 출연 도널드 서덜런드, 브룩 애덤스, 레너드 니모이, 제프 골드블럼 | 출시사 스펙트럼

누가 언제부터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한다는 상상을 하게 됐는지 알 수는 없어도, 외계생물에 대한 공포는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에 투영돼왔다. 그들이 문어발을 가졌건 로봇처럼 생겼건 역삼각형의 커다란 머리를 지녔건 외계인은 별 이유없이 지구인들을 살해하고 세뇌시키며 노예로 부리려 한다.

얼핏 잭 피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우주의 침입자> 또한 그런 외계인의 스테레오타입을 단순 반복하는 것으로 보인다. 외계에서 알 수 없는 액체가 떨어지더니 식물에 넝쿨을 내리곤 꽃을 피운다. 사람들은 이름 모를 이 꽃을 따다가 자기 집에 갖다놓는다. 그리곤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하룻밤 사이에 사람들은 무표정해지고 감정이 없는 듯 보인다. 떠돌이 외계생물이 지구에 정착하기 위해 인간을 복제해 신체를 얻은 뒤, 본래의 몸은 폐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밝혀낸 공중위생국 직원 매튜는 이에 맞서려 하지만 오히려 외계인화된 사람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역시 외계인은 지구의 적인가.

하지만, 이 원작은 세번 영화화되는 과정에서 모두 심오한 알레고리를 내포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첫 번째 영화인 돈 시겔의 작품(1956)에서 형체는 그대로이되 정신이 바뀌는 외계인화 과정은 당시의 매카시즘과 융합돼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유포에 비유됐다. 이런 사정 때문에 이 영화는 미국사회가 품고 있는 반공 이데올로기의 허구를 폭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벨 페라라의 1993년작에 이르면, 이 모티브는 인간의 존재란 육체인가 정신인가를 묻는 정체성에 관한 질문으로 바뀐다. 78년에 발표된 카우프만의 <우주의 침입자>는 한때 낭만적 혁명을 꿈꿨지만 이제 뿔뿔이 흩어져 시스템의 노예가 된 사람들과 시대를 비판하는 듯 보인다. 미국에서 가장 진보적 대도시인 샌프란시코를 배경으로 하는 점이나 외계인의 증상이 감정과 느낌없이 로봇처럼 살아간다는 것 등은 카우프만의 의도를 명확히 해준다. 갈수록 좀비가 되어가는 사람들을 표현하는 데 외계인만한 비유가 있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