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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밍 풀>,젊은 시네아스트 프랑수아 오종 [1]
홍성남(평론가) 2003-08-22

소소하게, 예리하게, 경계를 탐색하다젊은 시네아스트 프랑수아 오종의 국내 첫 개봉작 <스위밍 풀>

8월22일 프랑수아 오종의 <스위밍 풀>이 개봉한다. 지난해 이 수입됐으나 끝내 개봉하지 못해 오종의 영화로는 국내 첫 개봉작이다. 오종은 아직 낯선 이름이지만 최근 프랑스 영화계에서 돋보이는 신예감독. 올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스위밍 풀>을 중심으로 오종의 작품세계를 들여다본다. 그리고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를 방문해 나눈 인터뷰와 <스위밍 풀>에 관한 감독의 말을 덧붙인다. - 편집자

홍성남/ 영화평론가 gnosis88@yahoo.com

짐작하건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해외 게스트들 가운데 가장 주목을 끈 이는 프랑수아 오종이라는 프랑스의 한 영화감독이었을 것이다. 때는 마침, 국내에서 그만의 무정부주의적인 감성과 기발한 상상력이 빛나는 세계가 모습을 드러낸 자리가 마련되어 불과 몇달 전까지만 해도 오종이란 이름에 낯설어했을 이들이 그 이름을 자기만의 시네아스트 목록에 추가하고 난 뒤였다. 아마도 이건 멀리는 레오스 카락스부터 가까이로는 이와이 순지에까지 이르는, 한국의 영화광들이 특히 열광하는 감독들의 목록에 또 하나의 별난 신예가 등재되는 순간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오종의 부상은 국내에만 국한된 일은 절대 아니다. 예컨대 (2001) 같은 경우는 그가 어떤 ‘영향력’을 획득해내지 않았다면 나오지 못했을(아니면 애초 기획보다 초라한 모습으로 나왔을) 영화다. 주지하다시피 이 영화는 다니엘 다리외부터 카트린 드뇌브, 이자벨 위페르, 그리고 비르지니 르두아양 등 거의 세 세대에 걸친 프랑스 영화계의 뮤즈들이 한데 모임으로써 눈부신 광채를 발했다. 스타들의 그런 매혹적인 회합은, 오종이라는 신예 영화감독에 대한 신뢰가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오종에 대한 신뢰에 대해 더 이야기해보자면, 그것은 비평가들에게도 해당되는 사항이다. 아마도 (영화) ‘서적’으로서는 아직까지 오종에 대한 언급을 담고 있는 드문 책일 듯한 <신 영화 인명사전>(2002년 개정판)에서 저자인 영화비평가 데이비드 톰슨은 오종 항목의 말미에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오종으로부터 뛰어난 영화들이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

확실히 오종은 이제 국내외적으로, 또 관객과 비평가 양자 어느 쪽으로부터도 어떤 ‘기대’를 짊어진 영화감독으로 급부상했다. 그러니 그의 신작 <스위밍 풀>에 적지 않은 관심이 가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런 일일지도 모른다. 오종이라는 영화감독에게 적으나마 관심을 가진 이들은 과연 그가 사람들이 자신에게 보여주는 관심과 기대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지가 궁금한 것이다.

N극과 S극의 두 여자, 밀어내기와 물들이기

<스위밍 풀>은 오종으로 하여금 처음으로 칸영화제의 붉은 카펫을 밟을 수 있게 해준 영화다. 그런 만큼 그의 명성을 좀더 높여줬다고 할 수 있는 이 영화에서 오종은 마치 현재까지 그의 최고작이라고 평가할 <사랑의 추억>(2000)의 뒤를 밟고 있는 듯하다. 여기서 그는 <사랑의 추억>에서 주인공 마리 역을 맡았던 샬롯 램플링을 다시 기용해서 <사랑의 추억>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궤적을 서두르지 않는 차분한 발걸음으로 따라간다. <스위밍 풀>에서 오종의 관찰 대상이 된 사라 모튼(샬롯 램플링)은 추리소설을 쓰는 영국인 중년여성이다. 우리는 그녀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영화의 도입부 한 장면에서 얻을 수 있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고 있던 한 여성이 놀랍게도 바로 자기 앞에 그 책의 저자가 타고 있음을 발견하고는 사인을 해달라고 청하지만 사라는 사람을 잘못 봤다고 냉랭하게 말하고는 서둘러 자리를 뜬다. 이건 여류 추리소설가라는 ‘스테레오타입’에 아주 걸맞은 사라의 차가운 성격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녀가 창작의 위기를 맞이한 소설가로서 현재의 자신을 스스로 거부하는 상황에 처해 있음도 알려준다. 그녀는 지금까지 써왔던 것과는 다른 유의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녀와 사적으로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출판사 편집장 존(찰스 댄스)은 사라에게 남프랑스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 가서 여유로운 시간을 가져보라고 권한다. 프로방스에서 사라는 우아한 고독을 즐긴다. 그러나 그 이방의 아름다운 땅에 마련된 그녀의 ‘작은 천국’은 며칠 안 가 무너지고 만다. 존의 프랑스인 딸인 줄리(뤼디빈 사니에르)가 별장을 찾아옴으로써 사라의 고요한 평화 사이로 불쑥 침입해오게 된 것이다.

이제 <스위밍 풀>이란 영화가 사라와 존재만으로도 그녀에게 장애물이 되는 줄리 사이의 불편한 관계를 이야깃거리로 펼쳐낼 것이라 예상한다면 그건 틀리지 않는 예상이다. 소소하지만 예리한 갈등이 만들어지는 그 관계는 물론 서로 완전히 다른 두 인물 사이의 그것이다. 요컨대 무엇보다 사라가 고독함 안에서 안온함을 찾는 차가운 인물이라면 줄리는 반대로 (특히 성적인) 접촉에의 갈구로 불타오르는 듯 보이는 인물이다. 둘은 그렇듯 정반대편에 위치한 인물들이니 그 사이에서 미묘한 갈등이 생기지 않을 리 없다.

그러나 미카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2001)에서처럼 원래는 나이 많은 여성과 그보다 어린 남성 사이의 이야기로 출발했다가 오종 자신의 에서 잠깐 다루었던 가비(카트린 드뇌브)와 루이(에마뉘엘 베아르) 사이의 이야기로 방향을 바꾸었다는 <스위밍 풀>의 이야기에서 사라와 줄리의 관계는, 오종의 예전 영화들, <바다를 보라>(1996)의 남편을 기다리는 여자와 ‘침입자’, 그리고 <워터 드랍스 온 버닝 락>(2000)의 미남 청년과 그의 유혹자인 중년 남자의 관계에서처럼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무참히 희생시키는 유의 비극적인 것은 아니다. 그보다 둘은 서로가 서로를 향해 한 걸음씩 미세하게 가까이 다가간다.

<워터 드롭스 온 버닝 락>

<사랑의 추억>

오종 자신의 말에 따르면, “요점은 사라와 줄리의 육체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기를 내가 원했다는 것이다”. 영화의 제목인 수영장은 줄리의 공간, 가슴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그녀의 육체가 보여지고 그런 만큼 그녀의 자유로움이 과시되는 공간이다. 사라는 그 줄리의 공간을 들여다보다가 그녀(의 미스터리)를 차츰 이해하게 되고 스스로 그 공간에 발을 들이대면서 그녀와 유사해져간다. 그래서 영화는 다소 과장해서 보면 처음에 스카프를 두르며 목까지 자신을 감췄던 사라가 옷을 벗어 가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그녀는 수영복을 입더니 나중에는 나체를 드러내기에 이른다. 물론 후자의 중요한 장면은 국내에서는 심의문제상 원래 그대로는 볼 수가 없다).

현실과 가장의 재구성, 창조에 참여하기

영화의 한 장면에서 줄리는 사라를 향해 ‘엄마’라고 부른다. 처음에 우리는 이것이 엄마와 헤어져 사는 어린 여자의 결핍감의 표현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뒤에서 돌이켜볼 때 줄리가 사실을 이야기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비록 사라가 아니라고 했지만 그녀는 줄리의 엄마가 맞다. 사라가 줄리를 출산한 것은 자신의 몸을 통한 것이 아니긴 하지만 말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국 이 영화가 리얼리티와 픽션 사이의 흐릿한 경계에 대한 것임을 알아차려야만 한다(여기서 <스위밍 풀>은 <사랑의 추억>과 다시 만난다). 그리고 또 이 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영화가 흘려놓는 몇 가지 단서들을 주의해서 들여다봐야만 한다. 몇개의 힌트만을 간략하게 지적해보자. 우선 사라가 줄리라는 침입자를 처음 인지하기 전의 한 장면. 무슨 소리가 나는 것을 들은 사라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쪽을 향해 다가간다. 이때 카메라는 전진 이동을 하며 창 밖까지 보았다가 뒤돌아오는데, 이건 창/프레임의 은밀한 재구성을 통해 슬며시 다른 세계로의 이동이 이뤄진 일종의 결절점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사라가 컴퓨터 앞에 앉아 글쓰기를 하고 있는 것을 거울 안에다가 담는 장면은 그녀가 틀-세계와 틀-세계 사이에 중첩되어 위치하는 존재임을 넌지시 일러준다. 또 하나, 수영장 가장자리에 누워 있는 줄리를 카메라가 애무하듯 따라가다가 그 위에 서 있는 프랑크를 보여주는 장면도 한번 되새겨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직 수영장 청소가 끝나지 않은 시점인데 푸르고 깨끗한 수영장을 보여준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런 몇몇 단서들에도 불구하고 <스위밍 풀>이 그것들을 나중에 정교하게 짜맞추면 하나의 완성된 그림이 나오는 식의 영화가 아님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오종은 영화 속 세계에 대한 중요 단서들을 놓아두지만 해석의 지평을 완전히 닫아놓지는 않는다. 여하튼 이것이 창작 과정에 대한 영화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오종 자신도 그 점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는 <스위밍 풀>이 일종의 자화상 같은 영화라고 말한다. 그건 사람들이 흔히 그에게 하는 질문, 즉 “어떻게 당신은 계속해서 그렇게 많은 영화를 만들 수 있었죠?”(오종이 장편 데뷔작 <시트콤>을 내놓은 것이 1998년인데, 이후 그는 장편만 다섯편을 더 만들었다), “당신에게 영감을 주는 건 무엇인가요?” 같은 질문들에 대한 대답으로 만든 영화이기 때문이다. <스위밍 풀>에서 오종은 사라라는 소설가에다가 자신을 투영해 자신이 어떤 식으로 창조의 과정에 참여하는가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위밍 풀>은 창작의 이야기 속에 미스터리를 포함한 두 인물 사이의 진전하는 관계의 이야기를 끌어안는 식의 구성을 취하는 영화, 혹은 시간 순서상의 궤적으로부터 말하자면 후자에서 전자로 매끈하게 넘어가는 식의 구성을 보여주는 영화다. 그 과정 혹은 구조를 지켜보는 것은 꽤 흥미롭긴 하지만 숨막히게 하거나 감탄을 발하게 해주진 않는다. 그건 두 이야기가 서로 융합하는 그 이음매에만 신경을 썼지 각각의 이야기를 떼어놓고 보면 (관계의 문제에 대해서 그리고 창조의 과정에 대해서) 깊은 통찰력을 품지 못한 때문인 듯하다. 그러니 전체적으로 영화는 뉘앙스만 풍부한 것처럼 보인다. <스위밍 풀>이 보여주듯 오종은 꽤 영리한 영화감독인 것 같다. 그러나 아직 그에게서는 천착의 힘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니 지금 그를 보며 우리가 할 일은 때이른 열광의 시선을 모아주기 보다는 다음 행로를 지켜보는 쪽이 낫지 않을까. 이 에너지 넘치는 다산(多産)의 젊은 영화감독은 한 스트레이트 커플의 삶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다섯 개의 순간들에 대한 라는 다음 영화에 매달리고 있다고 한다. 잉마르 베리만의 <결혼 정경들>(1973)이 주요 레퍼런스라고.

▶ <스위밍 풀>,젊은 시네아스트 프랑수아 오종 [1]

▶ <스위밍 풀>,젊은 시네아스트 프랑수아 오종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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