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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달,<도그빌>의 대안적 성스러움에 의문을 제기하다

소박하고 창의적인 인간을 보여다오

라스 폰 트리에 학생의 취미는 영화 찍어 호주머니 털기지만, 그의 전공은 해부학, 부전공은 수사학이다. 오래전부터 그는 털없는 원숭이의 DNA에 관심이 많아서 만나는 사람마다 현미경을 들이미는 해부학적 열정을 보였다. 덕분에 무모증 원숭이가 공포를 느끼는 대상, 수치를 느끼는 상황, 군침을 흘리는 먹이를 관장하는 유전자를 발견했다. 이 사실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지만, 그 불온한 내용을 직설적으로 말할 배짱이 없어서, 아니면 가련한 무모증 원숭이에게 탈의의 수모를 주지 않기 위해, 그리고 어쩌면 도망가지 않을 만큼 야금야금 수모를 주면서 계몽하기 위해, 좀더 완곡한 어법을 찾기로 했다. 수사학을 부전공한 트리에 학생은 절실함을 밑천 삼아 단박에 영화가 자신의 화술에 가장 적합하다는 점을 알았다. 영화는 감추고 싶은 것과 드러내고 싶은 것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는 채널이었다. “인간은 다 음란하고 폭력적인 원숭이야!”라고 말할 때 자신을 숨길 수 있는 도주로가 거기에는 있었다. 또, “인간은 성스러운 꿈을 꾸긴 해”라고 말하면서 우아하게 컴백할 수 있는 표지판도 거기에 있었다. 한마디로 영화는 한손에 성경, 다른 손에 <펜트하우스> 들고 “성경은 이 책에 나오는 내용을 금하니 한번 보세요”라고 말하는 게 가능했다. 그는 장르 속에 함축된 정글의 법칙을 이용해 인간세계에 내재한 정글의 법칙을 그려나갔다. 발자크가 인간 세계를 하나의 풍경화로 암시하려는 야심에서 ‘인간희극’ 연작을 썼듯, 그는 털없는 원숭이의 DNA를 아주 그로테스크하고, 섹시하며, 유머러스한 인간희비극 시리즈에 담기 시작했다.

그 때문일까? 트리에의 영화는 무엇을 다루든 밑그림은 하나다. 인간의 잡스러운 물질성에 대한 깊은 혐오와 절대적 성스러움에 대한 갈망 사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한 분주하고 현란한 덧칠. 그가 <도그빌>에서 ‘덧칠용’으로 끌어들인 건 ‘미국 자본주의의 야만성’이라는 사회적 비판담론의 코드이다. 이 코드는 그의 인간 혐오증에 반응하는 관객의 시선을 자본주의라는 사회체제로 돌려놓는다. 그러니까, “당신은 왜 그렇게 인간의 부정적인 면을 들이미는가?”란 관객의 심문을 트리에는 자본주의라는 방패로 막는다.

<도그빌>은 외형상 미국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속성에 대한 은유로 읽을 때 정교한 레고를 맞추는 것 같다. 또, 그냥 자본주의 사회 일반에 대한 은유로 읽어도 무방하다. 예컨대, 도그빌 주민-톰-그레이스-그레이스 아버지의 관계는 노동자-지식인-교회-자본의 관계에 대응한다. 이 관계는 자본주의 권력관계의 위계이다. 이들이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은 먹이사슬의 순서대로이다. 주민들은 자기보다 약자를 착취하고, 톰은 주민의 무지에 기생하고, 그레이스는 주민들과 톰에게 헌신하는 척 죄의식을 자극해서 동원하고, 그레이스 아버지는 그레이스의 동원력을 이용한다. 이 모든 먹이사슬의 배후에는 그레이스의 아버지인 갱두목이 있다. 그는 단순무식하지만 모든 사건의 원인 제공자이자 해결사이다. 그는 확실히 자본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데 트리에는 그레이스와 그 아버지에 대해 혐오의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고 유도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주민들이 그레이스를 착취하는 과정에서 야비한 인간성의 해부도를 보여주는 데 영화의 대부분을 할애한다. 그는 배후에서 작동하는 자본의 건조한 악행보다 전면에서 감지되는 인간의 추행이 더 견디기 어려운 모양이다. 자본주의이거나 다른 체제이거나 그가 바라보는 인간은 한 종류일 것 같다.

인간의 잡스러운 물질성을 보안경 없이 응시하는 사람은 절대적 성스러움의 이미지를 발명한다. 그리고 그 숭고함의 프리즘으로 세상을 들여다보면서 세계의 추함에 치를 떨 수도 있다. 이 상황은 종교적 우울증이다. 순도에 기대어 순결한 몽상을 하지만, 대가는 잡스러운 즐거움의 분실이다. 때로 종교적 우울증은 사회의식의 탈을 쓰고 정치적 신경증으로 진화해서, 세상에서 순결한 질감이 사라진 원인을 사회구조 탓으로 돌리고 맹목적인 적개심을 투사하기도 한다. <도그빌>에는 이 모든 징후가 다 녹아 있다. 그런데, 그가 생각하는 대안적 성스러움의 이미지가 어떤 것인지 희망의 단서는 하나도 없다. 그 절대자는 하늘에서 도그빌을 굽어보는 가상의 시선으로만 등장한다. 나는 이제 그가 보이지 않는 신의 등 뒤에서 나왔으면 싶다. 우리집 냉장고에 벤츠 있다고 말하면 뭐하나, 찌그러진 티코라도 몰고 나타나야지! 나는 단 한번이라도 잡스러움에서 즐거움을 발명하는 소박하고 창의적인 인간을 그의 영화에서 보고 싶다.남재일/ 고려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