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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난 가족> 들고 베니스 가는 임상수 감독
2003-08-14

<바람난 가족> 개봉을 코앞에 둔 11일 만난 임상수(41) 감독은 표정이 밝았다. 데뷔작 <처녀들의 저녁식사>로 비평과 흥행 모두 성공했지만, 두번째 영화 <눈물>은 둘다 시원치 않았다. 경사가 큰 하강곡선을 탔던 그에게, 세번째 영화 <바람난 가족>은 평단의 높은 지지에 더해 흥행 전망도 나쁘지가 않다. 말투도 차분하고, 술 마실 때 입이 걸어지는 일도 줄었다.

여성들이 내 의도 잘 이해‥통쾌감 얹어서 보더라

-‘차갑다’ ‘냉정하다’에서 ‘통쾌하다’까지 반응이 다양하다.

=남자보다 여자들이 내 의도를 잘 봐주는 것 같다. 영화를 좋게 봤더라도 남자들은 우울하다, 나아가 암울하다고까지 말한다. 여자들은 거기에 더해 통쾌함이랄까, 그런 정서를 얹어서 보더라. 사실 내용이 우울하긴 하지만, 그점만 본다면 좀 아쉽다. 나는 웃자고 만든 건데.

-‘떡 영화’라면서 장선우나 홍상수 영화와 달리 여관장면이 안 나오는 게 특이하다.

=임권택 감독 조감독하면서 호남쪽 여관은 안 가본 데가 없을 만큼 여관을 많이 다녔다. 여관 냄새만 맡아도 ‘으윽’할 정도로. 우리가 좁고 막힌 데서만 하는데, 이 영화 마지막 처럼 천장이 높고 탁 트인 홀에서 하는 거, 그런 팬터지를 제공한다고 할까.

-그보다 주인공이 변호사라는 유한계급이어서가 아닐까. 영화의 주인공 가족은 먹고 사는 데에 이렇다할 구속을 받지 않는다.

=원래 바람필 때는 여관에 잘 안 가지 않나 들키키도 쉽고. 김인식 감독이 시나리오를 보더니 주인공 직업을 변호사가 아니라, 성공한 냉면집의 2대 사장으로 바꾸라고 하더라.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려면 냉면집 취재를 한참 해야하고…. 또 우리 세대 중에 자신 뿐아니라 사회까지 포함해서 어떻게 살아야할 지 알면서 그렇게 못 사는 이들을 고찰하고 싶었던 거고. 그래서 그냥 변호사로 갔다.

팬터지 캐릭터면 어때, 나쁘지만 않으면 되지

이문구 소설 밑줄 치며 진주 같은 대사 길어올려

-맞바람피는 부인 호정의 캐릭터가 팬터지라는 지적도 있는데.

=팬터지가 아니라 나의 비전이다. 호정은 비현실적이고 엉뚱하고 푼수같기도 하지만 비전을 구현하는 인물이다. 그 가정에는 시아버지부터 남편에게 이어지는 가부장제의 대물림이 있다. 그걸 끊어내고 비전을 찾아가는 거다. 팬터지면 또 어떤가. 나쁜 팬터지가 문제지.

-전작들도 그렇고, 대사가 매우 좋다.

=유골 발굴장에서 주민이 경찰과 다투면서 ‘법의 멱살을 잡는 게 아니라…’라는 말은 이문구의 소설에, 성지루가 오토바이 사고 낸 뒤에 경찰이 ‘허무하다고 지가 신이야…’라는 건 박완서 소설, ‘니들이 광국이를 알어’하는 성지루의 말은 김신의 소설에서 따왔다. “나는 엄마의 배가 아파서 나온 게 아니라, 엄마의 가슴이 아파서 나왔다”는 입양한 어린 아들의 말은 인테넷 입양 사이트에 올라 있는 입양아들의 말을 인용했다. 이런 말 내가 어떻게 만들어 내겠냐. 요즘 소설에선 따올 게 별로 없다. 이문구 소설 전집을 사다놓고 밑줄 쳐가면서 읽는다. 표절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한국문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감독이라고 용서되지 않을까. 사실 대사 한줄에 목숨을 건다. 무릎을 치게 하는 대사 열개만 있어도 시나리오가 확 좋아진다.

-끼가 앞서는 감독 같았는데, 그보다 논리적인 것 같다.

-그건 욕같이 들리네. 머리를 많이 써서 논리적으로 시나리오를 구성하려 하지만, 내키는 대로 막 흘러가는 것도 겁내지 않는다. 그게 없으면 영화가 별로 재미 없을 것 같다.

-다음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이 10·26 사건을 다룬 역사물이라고 들었다. 보통 같으면 역사적 사건을 다루다가 성이나 일상의 문제로 가는데, 임 감독은 그 반대로 간다.

=정통적인 역사물이 아니고, 10·26 사건 주변에서 우왕좌왕하던 이들을 그리는, 좀 우스꽝스런 총격영화다. 박정희라는 큰 체제가 사라지니까 다 패닉 상태에 빠지는 건데, 가부장의 대물림이라는 가족사를 다룬 이번 영화를 징검다리 삼아 건너가 보는 거다.

임범 기자 ism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