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툼레이더2: 판도라의 상자>로 당당히 할리우드 입성한 임달화
인간에게 불을 준 죄로 코카서스 산꼭대기에 끌려가기 전, 프로메테우스는 동생인 에피메테우스에게 절대 제우스가 주는 선물을 받지 말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아프로디테가 아름다움을, 아테나가 바느질과 길쌈하는 법을 그리고 헤르메스가 간교한 마음을 불어넣어 만들어낸 판도라라는 여인을 제우스가 보냈을 때, 에피메테우스는 그 선물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문제는 그 판도라에게 제우스가 준 작은 상자에 있었다. 제우스가 절대 열어보면 안 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행복하게 살아가던 판도라가 그 상자 안을 궁금해하기 시작했던 것. 그런 호기심이 결국 인간에게 재앙과 질병을 가져다주었다는, 이른바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인류 최초의 여성에게 원죄를 부여함으로 해서 남성 중심 사회에 힘을 실어주려 했던 이 그리스 신화 속의 작은 에피소드는, 이브의 선악과와 함께 아직까지도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중이다.
새로운 여성상의 계보에서 가장 최근에 등장한 여전사 라라 크로프트의 두 번째 영화가, 그런 판도라의 상자를 소재로 했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판도라의 상자를 두고 주인공 남녀가 보여준 갈등은, 신화의 내용을 역전시켰다는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판도라의 상자라는 서구 신화 속 물건에 대한 끝없는 경배를 보이는 것과는 달리 진시황릉에서 발견된 토용을 마구 부수는 장면이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중국 범죄조직의 보스 첸 로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라라까지 아무런 상관없다는 투로 토용을 마구 부수는 장면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것. 토용이 그 격투장면을 살려주는 적절한 소품이었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라라가 어떻게 해서든 토용들의 파괴를 막으려는 모습을 넣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임달화를 스타로 만들어준 영화 <첩혈가두>
임달화가 <툼레이더2: 판도라의 상자>에서 중국 범죄 조직의 보스 첸 로로 등장하는 장면
<툼레이더2: 판도라의 상자>의 시사회장에서 안젤리나 졸리 등 다른 주연배우들과 함께한 임달화.
재미있는 것은 그 장면에서 라라와 대결을 펼치는 중국계 배우가 우리에게 아주 낯익은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영화 초반부에도 잠시 등장하기는 하지만, 잠수복을 입고 어두운 곳에서 잠깐씩만 비쳐지기 때문에 ‘누구더라?’라는 생각을 하게 할 뿐 정확히 이름을 떠올리게 만들 정도는 아니었다. 엔딩 크레딧에 나오는 영문 이름 ‘Simon Yam’으로는 전혀 중국식 이름을 생각해내기 어려운 그 배우는, 바로 임달화였다. 야비한 범죄조직 보스 첸 로로 등장한 그는 비록 토용이 파괴되는 장면의 끝에서 라라에게 죽임을 당하지만, 특유의 ‘분위기’ 있는 연기를 선보이면서 할리우드에서의 첫 번째 출연작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것으로 평가받을 만했다.
임달화는 홍콩의 배우들 중 우리나라에서는 그다지 인기가 없는 축에 속했다. 성룡과 같은 친숙한 이미지의 배우는 물론 아니고 유덕화, 장학우, 주윤발 등의 배우들과 비교해도 그다지 인기를 끌 만한 요소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 57년생인 그의 연예계 생활도 배우로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패션모델로 데뷔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뒤에 TV시리즈에 출연하기 시작했던 것. 그의 초기 TV 출연작 중에는 양조위를 스타덤에 올렸던 <의천도룡기>(1986, 20부작)도 있는데, 그 시리즈에서 임달화는 장취산 역을 훌륭히 해내면서 함께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최근 케이블TV의 OSB 채널에서 다시 방영되고 있는 <의천도룡기>를 보면, 지금과는 다른 풋풋한 임달화의 모습에서 그가 인기를 끌 수 있었던 이유를 쉽게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TV스타로 떠오른 임달화가 영화배우로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89년 <의천도룡기>에서 호흡을 맞추었던 양조위, 그리고 한창 뜨고 있던 장학우와 함께 찍은 <첩혈가두>였다. 오우삼 감독의 야심작 중 하나였던 이 영화에서 임달화는 베트남에 침투한 CIA요원 로크 역을 연기하면서, 특유의 ‘베일에 가려져 있는 듯한’ 인물의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창출해 일약 홍콩 영화계 캐스팅 1순위에 오르게 된다. 그뒤 다른 홍콩 스타 배우들 못지않은 다작 배우가 되는데, 그중 <자유인> <첩혈쌍웅2> <용등사해> <히트맨> 등의 성공작들은 대부분 <첩혈가두>의 이미지를 연장시킨 액션영화들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액션연기만을 고집한 것은 아니다. <적나고양> <폭겁경정> <현대 애정고사> 등의 에로영화는 물론 <흑표천하> 등 코믹영화에도 출연했던 것. 게다가 자신의 활동 영역을 홍콩에만 한정하지 않고 다른 나라에서의 활동에도 큰 관심을 보였는데, 대표적인 예가 이일재와 함께 연기한 2000년작 우리 영화 <의혈>이다.
여하튼 이연걸의 뒤를 이어 블록버스터에 악당으로 출연하면서 안정적인 할리우드 신고식을 마친 임달화의 향후 행보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화된 것이 없는 듯하다. 하지만 이미 홍콩의 영화계에서는 그가 본격적으로 할리우드에 정착하기 위한 행보를 보일 것이라는 예측이 파다하다. 비록 이연걸, 주윤발과 같은 주연급으로 성장하기는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악역과 조연도 마다하지 않는다면 할리우드에서 그가 차지할 수 있는 배역은 꽤 많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 그 결과에 대해 부정적인 예측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응원하는 쪽에 서서 지켜본다면 흥미진진한 관전이 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철민/ 인터넷 칼럼니스트 chulmin@hipop.com
<툼레이더> 시리즈 공식 홈페이지: http://www.tombraidermovie.com
임달화 비공식 홈페이지: http://www.simonyam.com
임달화 공식 팬페이지: http://www.zlight.freeserve.co.uk